여행 이야기

2022.09.16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박물관, 트레비분수, 콜로세움

갯바우2 2022. 10. 4. 14:10

이탈리아 역사

로마 건국과 공화정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된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부터 도시 국가들을 병합하여

7왕 시대를 형성하게 된다.

그 후 지중해의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은 에트루리아인들에게 백여 년 간 지배를

받으면서 고대 그리스 문명을바탕으로 한 다양한 문명을 이어받아 도시 국가로 성장한다.

기원전 6세기경에는 에트루리아인들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웠으며 이후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기원전 1세기경에 지금의 영국과 스페인을 비롯하여 아라비아, 아프리카 북부와 소아시아 지역까지

정복하는 대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전설에 따르면 테베레 강에 버려진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도움으로 자라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데 이 도시는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 로마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제정 시대와 로마의 멸망

로마는 기원전 510년경 왕정을 폐지하고 이후 450여 년간 귀족과 평민들이 주권을 나누어

정치를 하는 공화정을 펼쳤다.

하지만 기원전 60년경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권력을 나누어 갖게 되면서

세 사람이 국가를 지배하는 삼두 정치가 등장했다. 1차 삼두 정치는 권력을 평정한

카이사르의 독재 정치로 끝이 나지만 카이사르는 양아들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 후 새롭게 등장한 2차 삼두 정치의 주인공인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세 사람의 권력 투쟁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공화정은 막을 내리고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시기에 사회 질서가 확립되고 종교의 확립, 복지 정책과 인구 정책, 세금 제도 등

체계적인 질서가 마련되었다.

옥타비아누스 이후 칼리굴라나 네로 황제와 같은 폭군이 권력을 물려받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정치적인 혼란을 거쳐 등장한 5현제(다섯 명의 훌륭한 왕)에 의해 로마 제국은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기원후 180년 이후로는 사회 기강이 흔들리며 서서히 쇠퇴의길을 걷게 되었고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395년에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으로 분리되었다.

수도 로마가 위치한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아 기독교와 헬레니즘 문화를 바탕으로 번영하였다.

 

중세 시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주인 없는 땅이 된 이탈리아 반도는 동고트족, 롬바르드족,

프랑크 왕국 등의 지배를 거쳐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들어간다.

11세기 이후부터는 황제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지방 영주가 통치하는 도시 국가들이 출현하는데,

이처럼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부터 르네상스 시작 전까지 교황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던 시기를

중세 시대라고 부른다. 

이때 발생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은 당시 이슬람의 세력 하에 있던

예루살렘을 얻기 위해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이어진 결과, 교황의 권력은 약화되고 로마는 황폐화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내분이 일어나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이 전쟁으로 이슬람의 미술 양식이 서유럽에 전해지는 등 다양한 문화의 전파와 함께 교역로가

확대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고 합리적인 의식이 성장하여

인간을 중시하는 르네상스 문화가 탄생한다.

 

르네상스 시대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도시 국가들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등은 상공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학문과 예술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예술 부흥 운동을 르네상스라고 부르는데, 인간성이 무시된 중세 시대가 예술의

암흑기였다면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벗어나 개인의 개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문화 창조의

움직임을 말한다.

르네상스는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지만 그 시작은 이탈리아이며 특히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중심으로 화려한 르네상스 문화가 펼쳐졌다.

한편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세력을 키워 동방과의 교역을 가로막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자, 무역을 독점하면서 세력을 키워 온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 국가들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반도는 새롭게 떠오른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강대국들이 세력을 다투는 장이

되어 피폐해졌지만 사보이 왕국은 그 와중에서도 세력을 키워 이탈리아 통일의 기틀을 닦았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

통일 전까지 이탈리아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서로 성격이 다른 여러 나라들이 모인 지역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한 자유와 평등사상이 전파되면서 이탈리아에도 외세의 지배를 물리치고

자유 민주 국가를 건설하자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1831년 이탈리아의 지도자 마치니는 청년 이탈리아당을 만들어 통일을 위한 운동을 펼쳤지만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그의 계획은 너무 급진적인 나머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가리발디 장군과 사르데냐 왕국(사보이 왕국)의 국왕인 에마누엘레 2세, 재상 카부르가 손을 잡아,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될 당시에는 국토의 통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들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전략적인 외교를 펼쳐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베네치아 땅을 되찾고,

프랑스 등의 외국 군대를 철수시키며 1870년에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 낸다.

 

파시스트와 그 이후

1870년, 이탈리아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지만 다른 방식과 문화 속에서 살아온 각 지방의 이탈리아인들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다. 게다가 경제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남부 지역의 농민과 빈민들의 반란이 이어졌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음에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자 이에 따른 경제 침체와 정치 불안이 심해지면서

이탈리아는 혼란에 휩싸이고 만다.

이 시기에 등장한 무솔리니는 사회주의를 반대하며 하나의 이념 아래 모든 사람이 복종, 단결하는 파시즘 운동을 펼친다. 무솔리니는 저항하는 사회주의 세력과 농민,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탄압하고 독일의 히틀러와 함께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를 내세우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국 전쟁은 패배로 끝났고 무솔리니가 체포되면서 파시스트당은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1946년 이탈리아는 국민 투표를 통해 왕제에서 공화국으로 체제를 바꾸었고, 1948년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출범하여

지금은 G8 국가 중 하나로 세계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치는 선진국이 되었다.

출처: https://somgle.tistory.com/276 [솜글:티스토리]

 

여행일정 : 성 베드로 대성당 - 바티칸 박물관 - 시스티나 성당 - 점심 - 판테온 - 트레비 분수 - 스페인 광장 -

                  진실의 입 - 캄피돌리오 광장 - 포로로마노 - 콜로세움 - 라테라노 궁전 - 저녁(한식) - 숙소

 

숙소 수영장

 

바티칸 시국

카톨릭의 총 본산으로,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이고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성당등이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326년에 예수의 수제자이자 초대 교황이었던 성 베드로가 묻혀있는 이곳에

처음 성당을 세웠다. 그 후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 때에 이르러 새로운 성당의 건축이 시작되었는데

120년의 세월 동안 브라만테, 미켈란젤로등 당대 최고 건축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여러 번 설계가 변경된 끝에 1626년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성당 자체는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으며 광장과 합해지면 열쇠 모양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천국문의 열쇠로서 가톨릭의 교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열쇠 모양은 베드로의 상징이자 교황청의 상징으로 성당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성당을 정면에서 보면 다섯 개의 문이 있다. 그중 가장 오른쪽의 것이 '성스러운 문'으로서 대희년인 25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2000년에 열렸으므로 이 문은 2025년에야 다시 열린다고 한다.

 

광장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왕국 제12왕조의 것임

 

우측 상단에 신문에서 가끔 보게 되는, 굴뚝에 연기를 피워 신임 교황의 선출(콘클라베)사실을 알리는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이 보인다.

 

성 베드로 광장

 

피에타

"피에타[Pieta]" 란 ...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

 

칼라 대리석으로 담요를 진짜 처럼 실감나게 만들었는데  감탄이 절로...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 미술관은 바티칸 시내에 위치한 미술관(박물관)이다. 물론 따로 건물 하나에 있는 게 아니고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을 포함해서 바티칸 내에 있는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들을 통틀어서 부르는 명칭이다.

- 시스티나 성당, 라파엘로의 방,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 피나코테카, 바티칸 도서관등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등의 대가들이 남긴 걸작 르네상스 회화들과 

역대교황들이 수세기에 걸쳐 수집한 막대한 미술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박물관의 입구였는데 문 위쪽에 있는 두 인물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이다.

 

예술적인 조각들이 가득 넘쳐나는 팔각정원

라오콘 군상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은 아테네와 포세이돈의 미움을 사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물뱀에게

물려죽는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했다는데,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통을 겪으며 몸부림치는 생생한 얼굴 표정과

근육 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토르소

뮤즈의 방 한가운데에서 볼 수 있는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되는 머리와 팔, 다리가 없는 조각상으로 미켈란젤로에게

복원 의뢰가 들어왔었지만, 이 자체로도 완벽한 작품이라 아름답다고 극찬하며 의뢰를 거절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토르소.

'토르소'는 완벽한 모습이 아닌, 몸통만 있는 조각 작품을 의미하는 용어

 

판테온에서 영향을 받아 1780년대 올린 천장의 돔으로 유명하다. 이 돔의 크기는 21.6m다

 

방의 좌우에는 주피터, 안토니우스, 하드리아누스 황제, 헤라, 주노의 상들이 있다.  

2세기경에 만든 금박의 헤라클레스 상은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가져온 것으로 헤라클레스는 항상 몽둥이와 사자 가죽, 황금 사과를 들고 있다.

 

 중앙에 아주 큰 세숫대야 모양의 붉은 조각품(욕조라는 말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물받침대였을 것으로 추정)이 있다. 이 작품은1700년대에 네로의 황금 궁전 터에서 옮겨 왔다.

닥에는 오밀조밀한 모자이크가 있는데 그 내용은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둔 전쟁의 모습이다.
이 모자이크는 3세기의 작품으로 아주 멀리 움브리아 주의 한 온천 바닥에서 뜯어 왔다고

 

바닥 모자이크화, 푸른 대리석은 아주 드물다고...

 

아라찌의 복도
아라찌(Arazzi)는 바로 벽걸이용 융단을 뜻한다. 우리나라는 카펫을 많이 사용하지 않지만 유럽은 카펫 사용이 많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대개 바닥을 대리석이나 석재로 마감하고 카펫을 깔아도 냉기가 그대로 올라온다.

래서 아라비아 상인들로부터 가져온 카펫을 바닥에 깔기보다는 벽에 걸어 두었는데, 이것이 또 예술적 가치가 있다.

바람이라도 살랑 불면 카펫이 흔들리면서 카펫의 무늬들이 입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카펫을 이용한

예술이 발달했다.
여기 있는 카펫들은 1523~1534년 사이에 만든 것이다. 원래는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었는데 1838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내용은 성화. 

 

시스티나 성당 입구 -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과 천장화

교황 식스투스 4세를 위해 조반니노 데 돌치가 1483년에 완성한 개인 예배당으로써 교황 선출 선거가 열리는

중요한 장소이다.

이곳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으로 박물관의 하이라이트가 되고 있다.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 아쉬웠지만...

천장화와 제대화의 명성에 가려 유심히 보지 않는 양쪽의 벽화를 살펴보자. 제대를 등지고 섰을 때 오른쪽이 구약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모세의 일생이며 왼쪽은 신약성서의 주인공 예수의 일생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그림들은 당대의 이름난 화가들이 모두 모여 그렸으나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에 비하면 르네상스의 사상을 담지 못하고 중세적인 화법으로 그려졌다.

1508년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명을 받아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창세기 9장면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천지창조’로 많이 알려져 있다.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작업의 프로그램을 짜고 거기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천장화 성서의 순서와는 반대로 노아에 관한 3가지 이야기, 즉 입구 쪽에서부터 그려졌는데, 완성까지는 4단계를

거쳤다.

첫 번째 단계는 2개의 곡면 벽화에 그린 3가지의 노아에 관한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으로 1509년 9월 15일에 완성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추방〉과 〈이브의 창조〉, 4명의 나체상, 두 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0년 8월에 완성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아담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달과 해의 창조〉 〈빛과 어둠의 창조〉의 4가지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 5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1년 1월과 8월 사이에 완성되었다.

네 번째 단계는 나머지 모든 원형 벽화로 같은 해 10월부터 1512년 10월 사이에 완성되었다.

 

현재 출구로 쓰이는 주세페 모모의 나선계단

 

판테온

다신교 국가인 로마 제국에서 특정 신이 아니라 모든 신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되었다.

웅장하고 여전히 제 모습을 간직한 돔으로 유명한 곳

로톤다 광장에 있는 판테온은 로마 건축 기술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지는 돔으로 유명하다.

습지의 지반에 세워졌지만 2천 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히 대단하다.

판테온 안에는 화강암과 노란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깔리고 반구형 돔이 있는 커다란 원형 방이 있다.

이 원형 홀에서 43.3m 높이의 돔 꼭대기까지는 반구의 지름과 정확히 일치하며 완벽한 반구형을 이룬다.

돔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눈'(오쿨루스)이라는 이름의 둥근 천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온다.

판테온은 120년경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예전에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기원전 27년에

지었던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아그리파의 건물은 화재로 80년에 파괴되었으나, 하드리아누스가 지은 우아한 건물의 현관 위편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건물은 당시로써는 혁신적이었으며, 그리스의 사원을 연상시킨다. '판테온'이란 '모든 신들의 신전'이라는 의미이며,

원래 고대 로마인들이 숭배했던 행성의 신에게 바치는 건물이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포카스가 609년 교황 보니파시오 4세에게 선사한 이후, 판테온은 기독교 교회인 '산타 마리아 아드

마르티레스'가 되었다. 포카스의 선물임을 기념하여 '로마 포럼'에는 기둥이 세워졌다.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건물은 약탈당하고 수난당했으며,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가 663년 금박이 입혀진

청동 지붕 타일을 약탈해 갔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교황 요새의 방어 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를 실행하면서 포티코에 있는 청동 천정

대들보들을 떼어가 산탄젤로 성의 대포를 만들었다.

이 건물은 무덤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두 명의 이탈리아 왕과 라파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화가와 건축가들이 잠들어 있다

콘크리트로 된 거대한 돔이 특징. 물론 원시적인 콘크리트로, 지금의 것과는 다르다.

콘크리트에 말총을 섞어서 인장력을 보강했다고 한다.하지만 돔형 구조와 말총만으로는 무게를 지탱하기 힘들어

아래 사진에 나온 것처럼 돔 안쪽에 사각형 모양의 홈을 다섯 층으로 28개씩 일정하게 파내었다.

이러한 시공방법은 돔의 중량을 감소시키는 건축학적 효과와 동시에 아름다운 무늬의 역할을 통한 장식적 효과까지

발휘하게 하였다.

또다른 특징으로는 화산재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화산재 등을 사용하는 저밀도 콘크리트는 물에 굉장히 강하다.

일반 콘크리트는 물이 내부로 스며들지만, 저밀도 콘크리트는 물이 내부로 스며들지 않으면서 상대적으로 가볍다.

이런 특징이 콘크리트의 수명을 굉장히 길게 연장시킨다. 이러한 공법이 적용된 사례의 대표 격 건축물이 바로

로마의 판테온 돔으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고 그동안 지진으로 인한 피해로 인한 보수 이외에는 대대적인

보수가 거의 없었다

 

 

건물의 최상부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구멍을 뚫었는데 지름이 9 m에 달한다. 이 구멍은 오쿨루스(Oculus)라고 불리는데 라틴어 눈이란 뜻이다.

안에서 생기는 상승기류가 구멍으로 나갈 때 기압차로, 비가 내려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알려졌으나,

상승기류가 가는 비가 내리는 것을 막는 정도고 굵은 비는 못 막는다. 보통은 개방된 건물이기 때문에 기압차가 없으니 가는 비도 그냥 쏟아져 들어온다. 바닥에는 비가 빠져나가는 배수구도 있다.

 

라파엘로의 무덤

 

트레비 분수

'Trevi'란 삼거리라는 뜻으로 이곳으로 세 개의 길이 모이는 데서 유래되었다. 1732년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13세가

주최한 분수 설계 공모전에서 우승한 니콜라 살비(Nichola Salvi)의 작품으로 그의 사후인 1762년 완성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한때 150만 명에 달했던 인구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14개의 고가 수로를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물이 풍부해지고 도시 곳곳에 분수가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가 되어 교황들에 의해 상수도를 전면 수리하게 되고 새로운 수도를 개발하여 물의 공급을

원활히 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새로운 여러 분수를 세우게 되는데 그 중 최고의 작품이 바로 이 트레비 분수이다.이 분수의 물은

아우구스투스 대제의 집정관이었던 아그리빠가 건설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수로를 그대로 이용해 공급되고 있다.

트레비 분수는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로마에서 가장 멋진

분수로 손꼽힌다.

배경은 폴리 궁전의 벽면을 절묘히 이용하여 개선문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으며 건물의 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반인반어의 트리톤이 거친 바다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하는 두 마리 말을 앞세우고 가운데 바다의 신 넵튠이 큰 조개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조각은 브란치의 작품이다.

이곳은 낙차를 크게 하려고 땅을 깊게 팠기 때문에 물이 힘차게 흐르고 조각 작품도 이에 잘 어울리도록 역동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스페인 광장

바티칸 주재 스페인 대사관이 있어서 스페인 광장으로 불리는 곳

계단 아래쪽 중앙에 바로크 양식의 난파선의 분수와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 졌다.

뒤에 보이는 건물이 트리니타 데이 몬티 Trinita dei Monti  교회, 몬티 교회, 번역하자면 삼위일체 교회

 

진실의 입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 가면으로, 지름은 1.5m 정도이다.기원 전  4세기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강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을 조각한 것인데, 이 조각상이 진실과 거짓을 심판하는

'진실의 입'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로마시대에는 가축시장의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되었다고도 하는데, 확인되지 않는다.

중세 때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사람을 심문할 때 심문을 받는 사람의 손을 입 안에 넣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이 잘릴 것을 서약하게 한 데서 '진실의 입'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캄피돌리오 광장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오르는 계단 '꼬르도나타(Cordonata)'라고 불리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광장 역시 1538년 미켈란젤로가 설계하였으며 이후 1세기 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광장 정면의 건물은 고대 로마의 폐허 위에 12세기경 세워진 세나토리오 궁(Palazzo Senatorio)으로서

현재 로마 시장의 집무실과 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오른쪽은 콘세르바토리 궁(Palazzo dei Conservatori)이며 왼쪽은 누오보 궁(Palazzo Nuovo)인데 양쪽 모두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전시하고 있는 캄피돌리오 박물관(Museo Campidoglio)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

 

정면의 동상은 로마제국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

 

포로 로마노

세나토리오 궁 뒤쪽 좌우에 설치된 테라스나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면 언덕 아래로 넓게 펼쳐지는 포로 로마노

(로마 공회장) 유적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포로 로마노가 세워진 지역은 처음에는 비가 오면 물이 괴는 습지였는데, 하수시설을 확충한 후 도시 생활의 구심점을 이루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주변의 언덕들이 마주치는 곳이어서 도시를

방어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공회장(Foro)은 신전, 바실리카(공회당), 기념비 등의 건물들로 구성된 도시 공간으로 공공생활을 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었다.

나중에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약 1,000년 동안 로마제국의 심장 역할을 했다. 283년 화재로 파괴된 후 복구되긴 했으나 중세 이후로는 이 공회장의 건물들을 헐어 건축자재로 쓰기도 했다.

그 후 1871년에 발굴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한때는 막강했던 위엄 있는 건물들이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 옛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로마의 영광을 되새겨볼 수 있다.

 

사투르누스 신전(Temple of Saturn)
사진 오른쪽의 사투르누스 신전은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기원전 497년에 지어졌으며, 포로 로마노의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로마 왕정 말기에 지어져 파괴와 복원을 반복하였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잔해는 세 번째로 지어진 신전의 유적이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Temple of Vespasian and Titus)
사진 왼쪽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은 콩코르디아 신전과 사투르누스 신전 사이에 위치한 신전으로,

사후 신격화된 베스파시아누스황제와 그의 아들인 티투스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기원후 79년에 완공되었으며, 중세 시기에는 대부분이 헐려 나가고 요새로도 사용되는 등 풍파를 겪었다.

이때문에 현재는 셀라의 일부,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 3개만이 겨우 남아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Arch of Septimius Severus)
사진 가운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포로 로마노 북서쪽에 자리한 거대한 개선문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황제가 파르티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203년에 지어졌다.

세베루스 황제 사후 2명의 아들인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 황제에 올랐는데, 이후 황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카라칼라는 게타에게 기록말살형을 내렸고, 이때문에 개선문에 새겨졌던 게타의 모습도 지워졌다.

현재는 포로 로마노에서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로, 포로 로마노의 상징물들 중 하나이다.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Temple of Castor and Pollux)
사진 오른쪽 기둥 세개만 보이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은 로마 공화정이 로마 최후의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몰아낸 레길리우스 호수 전투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기원전 495년에 지어진 신전으로,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인 카스트로와 폴룩스에게 바쳐졌다.

공화정 시기에는 원로원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제정 시기에는 황실의 수장고이자 도량형을 담당하는 행정 부서가

이 곳을 사용했다.

4세기 경에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고, 현재는 오직 3개의 대리석 기둥만이 남아있다.

 

경마용 직선 경기장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콜로세움 서쪽에 서 있는 이 문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기 312년 밀비안(Milvian) 다리 전투에서

그의 라이벌이었던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기념으로 세운 개선문이다.

높이는 21m에 달하며 벽면의 부조는 황제의 업적과 전쟁 장면 등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전쟁에서 이긴 장군들은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 황제에게 승전을 보고했다고 한다.

로마에 있는 개선문 중 가장 크며 파리의 개선문도 이것을 본떠 지어진 것이다.

 

콜로세움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본래는 비공식 이름이었던 콜로세움(Colosseum)의 유래에 대해서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Colossus Neronis)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Colossale)와 어원이 같다는 

설이 있는데 중세에는 그 자체가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글라디아토르의 시합과 맹수연기 등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다소 잔인한 측면이 있으나 고대 로마 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그 내용을 즐기는 하나의 공공 오락시설이었다.

한편, 로마 정치가들에게 원형경기장은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화합을 도모하며 때로는 로마나 귀족의 권위에 불복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보복을 암시하는 공간이었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m로 4층이며, 하단으로부터 도리스,이오니아,코린트 양식의 원주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放射狀)으로 설치되어 있다.

 

왼쪽은 라테라노궁,  오른쪽은 라테라노 성당

4세기 초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난 후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주거지로 제공하였으며

(여기까지는 콘스탄티누스 기증장의 내용이며, 이 콘스탄티누스 기증장은 르네상스 시기 인문학자인 로렌초 발라의 검증에 의해 교회의 이익 수호를 위해 만든 위조문서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약 1,000년간 역대 교황은 라테라노궁에 기거하였다.

10세기, 교황 세르지오 3세는 화재로 소실된 궁전을 수리하였으며, 거기에 단테가 “인간의 실적을 뛰어넘는다.”라며

칭송할 만큼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호화스럽게 치장하였다.

그러나 아비뇽 유수기에 들어서면서 교황이 로마를 비우게 되자, 자연스레 라테라노 궁전은 쇠퇴해져가기 시작했다.

1307년과 1361년의 화재로 수복이 불가능할 만큼 소실되어 아비뇽에서 많은 인부들이 재건하는 데 파견되었지만,

본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교황이 로마에서 돌아왔을 때, 산타 마리아 트라스테베레 성당과 그 다음에 성모 대성전, 최종적으로 바티칸에 거주하게

되면서 교황궁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하였다.

교황 식스토 5세는 건물을 무너뜨려, 오늘날의 작은 건축물을 하나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