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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7 폼페이, 아말피해안, 소렌토, 나폴리

갯바우2 2022. 10. 5. 16:33

여행일정 : 폼페이 - 점심 - 아말피 해안도로(아말피, 포지타노) - 소렌토 - 폼페이 - 나폴리 - 저녁 - 숙소

 

폼페이

번영했던 도시

전략적 위치인 사르노 강 근처에 위치한 덕분에, 폼페이는 상공업의 중심지였다. 폼페이는 올리브, 올리브 기름, 와인

그리고 생선 소스(garum)등을 거래하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한때 12,000명이 거주하는 도시였던 폼페이는 목욕탕, 가옥, 사원, 공공건물, 시장, 사창가, 여관 그리고 카페들이

있었으며 2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까지 있던 유명한 도시였다.

5개의 작은 도시들이 합쳐진 것으로 추정되는 폼페이의 첫 도시 계획은 오스칸이라고 불리던 이탈리아인들이 거주하던

기원전 6세기에 세워졌다.

수 세기동안 폼페이는 그리스인들과 삼늄인들에 의해 함락되었고 기원전 80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폼페이는 서기 62년의 수 많은 건물들을 붕괴시켰던 거대한 지진이 발생하기 전까지 번영했었다.

그리고 서기 79년 재앙적이었던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화산폭발과그 여파

서기 79년,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화산 폭발은 베수비오 산의 고원 위에 있던 도시들을 질식시켰다.

베수비오 화산은 당시 수백년동안 활동하지 않았었지만 그 날 폭발하며 엄청난 양의 돌과 가스가 합쳐진 버섯 구름이

상공 30 km까지 치솟았다.

버섯 구름은 곧 붕괴하며 거대한 화쇄암 구름이 베수비오 산을 타고 내려왔다. 그곳에서 도망가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폼페이의 대부분 집들은 5미터 깊이의 부석과 재에 덮여졌다. 이 숨겨진 도시들을 고고학자들이 발견하는데

무려 1700년이 걸렸다. 그러나 도시들의 보존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우수했다.

다시 발견된 폼페이

재앙적이었던 종말이 지나고, 1594년 한 건축가가 수로를 파다 폼페이의 폐허를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 수세기동안

폼페이의 역사는 자취를 감췄었다.

그러나 1861년이 되어서야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의 감독하에 체계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피오렐리는 화산 폭발 당시 희생되었던 사람들을 석고로 보존하는 작업을 감독하였다.

이 석고들은 지금도 현장에서 볼 수 있다.

현재까지 66 헥타르 면적 중 44 헥타르가 발굴되었으며, 발굴 작업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발견된 새로운 유산들과 다시 쓰여지는 역사

폼페이가 발견된지 270년이 지나고 나서야 대규모의 고고학 발굴 작업이 재개되었다.

당시 발굴 작업이 재개된 지역은 1,000m² (10,000 ft²) 면적의 제 5구역의 폼페이였으며 당시엔 여전히 화산 잔해속에

묻혀있었다.

2012년에 200명이 넘는 전문가들과 기술자들이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동원되었으며, 1억 500만 유로(1억 1600만 달러)가 보존, 유지, 복구 작업을 위해 투자되었다.

대부분의 자본은 유럽 연합에서 지원하였다.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구조의 건물들 (밝은 색의 술집 등), 화려한 프레스코화, 신화적 내용을 담은 모자이크들 그리고 벽낙서들이 발견되었다.

최근에 화산 폭발이 일어난 시기가 서기 79년 10월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휘갈겨진 문자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종전에 추정되었던 시기보다 두달 늦은 시기이다.

폼페이 발굴 책임자인 마시모 오산나에 따르면 수정된 폭발 날짜는 10월 24일이라고 한다.

거의 이천년이 지나고 나서도 폼페이의 폐허는 풍부한 고고학적 유산들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새로운 발굴 지역들은 아직 일반인들은 입장할 수 없다.

 

이 사각형의 포르티코(특히 대형 건물 입구에 기둥을 받쳐 만든 현관 지붕)는 위에서 설명했던 극장의 무대 바로 뒤에

위치한다.

이곳은 처음엔 극장 관객들이 쉬는 시간에 거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하지만 서기 62년 지진 이후 검투사들을 위한 막사로 개조하였다.

 

라지 티어터 오브 폼페이

이 극장은 그리스 형식과 자연적인 경사로 지어진 5000석을 보유한 큰 극장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 이 극장은 로마 스타일로 복구되고 확장되었다. 현재 이 극장에선 매해마다 여름 축제인 Pompeii Theatrum Mundi를 개최한다.

 

로마시대의 인도와 마차 동행로, 엊그제 마차가 지나간 듯 바퀴 자국이 선명히 보였다

 

Forum Baths 

Forum Baths 목욕탕은 각각의 입구가 있는 남탕과 여탕으로 구분되어 있다.

벽들은 정원이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으며, 둥근 천장은 프리즈(방이나 건물의 윗부분에 그림이나

조각으로 띠 모양의 장식을 한 것)로 꾸며져 있다.

 

석축 아래에 장작을 떼워 온기를 유지했다고

 

여기는 탕

 

환기구까지...

 

음수대

 

홍등가로 가는 표식? 이라고 들은 듯...

 

바닥 모자이크가 멋지다.

 

멀리 보이는 베수비오 산

 

폼페이 박물관

 

석주 장식물들

 

벽화들

 

말의 화석

 

아이와 아버지

임산부의 화석이라고...

 

아말피, 포지타노

아말피는 이탈리아 반도 서부 해안 캄파니아주에 있는 어촌 겸 관광지이다.

오늘날에는 인구 5천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과거에는 아말피 공화국의 수도로 번영했었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래스가 사랑했던, 아말피라는 이름의 요정이 일찍 죽자 슬픔에 잠긴 헤라클레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묻어주려 찾은 곳이 현재 아말피라는 지명이 붙은 유래다... 라는 전설이 있으나,

사실은 4세기 중엽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러스로 가던 어느 귀족이 풍랑을 만나 이곳에 터전을 잡은 것이

아말피의 기원으로, 역사적으로 처음 언급된 것은 서기 533년 나폴리를 비롯한 이 지역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된 것으로 확인된다.
850년 경에 이르러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와 함께 4대 해상강국으로 꼽힐정도로 융성했었으나,

약 1077년부터 노르만족의 지배를 받고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부상하면서 서서히 쇠퇴하였다.

아말피의 집들은 방어를 목적으로 해안 언덕 지대를 중심으로 계단형으로 배열되어 모여 있었다.

아말피 문화로는 뱃사람들에게 뱃일을 마치고 항구에 쉽게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눈에 잘 띄는 단색으로 집을 칠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 덕분에 마을 경치가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기로 유명하다.

 

아말피 해안 -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 - 아말피 - 포지타노 소렌토로 이어지는 해안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50선 중 낙원부문에서 1등 한 곳.

좁다란 왕복 2차선 도로 중 일부 구간은 이미 900년 가까이 된 길이다. 중간중간 돌로 된 다리는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게 신기할 정도로 오래돼 보이기도 한다.

 

타고왔던 대형 관광버스는 살레르노에서 우리를 내려주고 폼페이로 돌아가고, 아말피해안 관광전용 중형버스로 갈아탄다.

소렌토

나폴리만(灣)을 사이에 두고 나폴리와 마주하며, 살레르노에서 35㎞ 떨어진 지점으로, 배후에 오렌지·레몬·포도 등을

재배하는 과수원이 펼쳐진 산지를 등진 경승지로,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의 나폴리 민요로 알려진 곳이다.

포도주·올리브유가 생산된다.

그리스인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는 수렌툼이라는 휴양지였다. 7세기에는 자치 공작령의

수도였으며, 1137년에 노르만족(族)에 정복당해 시칠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거리의 중심은 타소 광장(廣場)이며, 1544년 이곳에서 태어난 시인 토르쿠아토 타소(Torquato Tasso)의 기념비가 있다.

시내에는 15세기에 재건된 성당이 있고, 14세기에 건축된 아름다운 아시시의 성(聖)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캄파니아의

장식미술품, 중세의 조각·그림 및 고전양식의 유물 등이 소장되어 있는 코레알레디테라노바 박물관이 있다

 

시인 토르쿠아토 타소(Torquato Tasso)의 기념비

 

THE LEADING HOTELS OF THE WORLD라는데 안들어가 봐서... 

 

소렌토 골목시장 - 여기서 그 유명한 레몬비누와 싸다 싶은 선물할 가죽제품을 몇개 구매

 

소렌토 역에서 기차로 폼페이로 이동

 

아침에 지나왔던  폼페이 앞의 식당에서 점심

 

나폴리

이탈리아 캄파니아의 주도(州都)이자 남이탈리아의 중심 도시로, 로마 밀라노에 이은 이탈리아 제3의 도시이다.
이탈리아 통일 전까지 천년 가까이 북이탈리아와는 판이한 역사를 이어온 남이탈리아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지금도 지중해에 닿아 있는 항구도시로 영어로는 네이플스(혹은 네이플)라고 한다.

 

Castel Nuovo

‘새로운 성’이라는 뜻의 카스텔 누오보는 1279년 프랑스의 앙주 가문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나폴리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략적 위치에 있는 이 성은 처음에 왕궁과 요새로 동시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나폴리가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발달하던 시기 지오토나 보카치오 등의 예술가, 작가들이 머물기도 했었다.

그러나 15세기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이 앙주 가문을 무너뜨리고 이 성을 점령하게 되면서 성의 역할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라곤은 나폴리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1467년 입구에 거대한 대리석 개선문을 세웠다. 한편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플래시비토 광장

왕궁 정면과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의 열주에 둘러싸인 광장으로 나폴레옹 치하인 1809년 나폴리 왕이면서

공화주의가인 뮐러가 왕궁 앞을 시민을 위한 광장으로 조성했다.

플레시비토 광장은 나폴리의 중심으로 중요한 행사나 문화 이벤트가 자주 열린다.

 

Royal Palace of Naples

왕궁 건물은 나폴리가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던 1602년 완성되었지만, 1734년 부르봉 왕조 때부터 왕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 후 19세기에 큰 규모로 보수를 하였고 역대 나폴리 왕들의 석상이 왕궁 정면에 세워졌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현재 내부에는 나폴리 왕가의 소장품들과 미술 수집품이 전시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산프란체스코디파올라성당

반원형의 회랑을 가진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은 1846년 네오클래식양식으로 건축되었다.

광장 중앙에 있는 동상은 부르봉 왕가의 페르난도와 카를로 3세 이다.

한편 성당 앞, 플레시비토 광장은 나폴리의 중심으로 중요한 행사나 문화 이벤트가 자주 열린다.

 

Palazzo Salerno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로 2015년부터 이탈리아 남부 군 사령부로 사용되고 있다.

 

산카를로 극장

산 카를로 극장은 1737년 부르봉 왕가의 카를로 3세에 의해 왕궁 바로 옆에 세워진 가극장이다.

로마, 밀라노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3대 오페라 하우스로 꼽히는 곳으로 내부 홀은 음향 효과가 매우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Galleria Umberto

1891년 왕공된 이 건물은 당시 이탈리아 왕국의 왕인 ‘움베르토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고급 상가 건물이다.

이곳은 밀라노의 ‘갈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거의 흡사한 십자형 디자인으로 지어졌으며,

4곳의 아케이드 입구는 웅장한 대리석으로, 천정은 철골과 유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