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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9 발도르차평원, 시에나성당, 토스카나와이너리, 피렌체

갯바우2 2022. 10. 7. 01:57

여행일정

발도르차 평원 - 사이프러스 나무길(막시무스 하우스) - 시에나 성당 - 캄포 광장 - 만자탑 - 토스카나 와이너리

- 피렌체 - 시뇨리아 광장 -단테의 집

 

발도르차 평원

발 도르차(Val d’Orcia)의 경관은 시에나 내륙 농업 지방의 일부가 14, 15세기에 도시 국가의 영토로 통합되었을 때,

훌륭한 통치의 이상을 반영하고 미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조성하기 위해 재설계하여 개발한 지역이다.

이곳은 원추형에 가까운 낮은 언덕 위에 요새화된 거주지가 있는, 편평한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 풍경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잘 관리된 르네상스 농촌 풍경의 아름다움의 전형이 되었다

막시무스 하우스 와 사이프러스 나무길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곳이라 한국에서는 막시무스 하우스로 불리지만

실제 명은 Poggio Covili, 밀이 한창 자라는 4월이면 최고의 경관을 볼 수 있고,민박도 가능하다고

 

시에나

피렌체의 남쪽 약 50km 지점, 옴브로네강()의 지류 사이에 끼어 있는 해발고도 320m의 구릉에 위치한다.

포도주 산지로서 이름높은 키안티 산지에 위치하여 포도주 ·대리석 ·농기구 등을 생산한다.

시()는 에트루리아인()이 건설하여, 로마인의 식민시()가 되었으나, 현재 고대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벽돌과 석재로 축조된 중세의 시가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중세에서 근세에 걸쳐 피렌체 ·아레초등의 도시와 교황세력, 에스파냐 세력이 시에나의 지배를 둘러싸고 서로

다툼으로써 침략당하기도 했다.

1559년 이후에는 토스카나 공국()에 병합되어 이탈리아 통일에 이르렀다.

시에나의 르네상스는 14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특히 회화에서는 14세기 전반에 시에나파()가 성립되었다.

카시아 가도()에 위치하고 있으나 간선철도에서 떨어져 있으므로 근대도시로서의 발전은 별로 없고,

옛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탈리아 고딕양식의 대표로 알려진 시에나 대성당, 코르사델팔리오(중세풍의 경마)가 해마다 열리는 캄포 광장,

만자탑()이 있는 시청사 등이 있다.

 

시에나로 들어가는 언덕, 왼쪽이 산도메니코성당  오른쪽이 시에나성당

 

캄포광장으로 가는 길

 

말고리를 메는 곳

 

캄포광장, 푸블리코궁전, 만자 탑 

시에나의 중심지이자 시에나 초기 역사의 중심지이다.

특이한 구조로 유명한데 광장은 매우 넓으며 전체적인 모양이 마치 조개 껍데기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하얀 돌로 9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은 중세시대 때의 9개 의회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광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만자탑 (Torre di Mangia)은 길이 102m의 오르막 계단을 올라가면 시에나의 멋진 시가지 전경을 즐길 수 있고, 탑 옆에는 푸블리코 궁전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조각가 야코포 델라 퀘르치아 작품의 《가이아의 분수》 복제품이 있는데, 진품은 시립박물관에 있다.

 

푸블리코 궁전

공화국 정부를 위치시키기 위해 13세기 말에 지어진 푸블리코 궁전은 시에나의 시청이다.

이 건물은 이탈리아 중세 건축을 보여 주는 훌륭한 예로, 고딕 양식의 영향이 깃들어 있다.

종탑인 '토레 델 만지아'는 1425년에서 1344년 사이에 세워졌다.

 

만자 탑

102m 높이의 벽돌로 만든 탑으로 이탈리아에서 두번째로 높은 탑

' 만자 ' 는 최초의 종치기라고

 

시에나 성당으로 가는 골목길

 

시에나 대성당

흰색과 녹색 도는 검은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고딕 건축 양식의 건물

15세기, 시에나는 상업적 지배력을 피렌체에 내주고 난 후였으나 예술적 재능을 지닌 이들이 모여드는 중심지였으며,

이탈리아 예술계에서 가장 위대한 거장들의 아름다운 작품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보물과 같은 작품 대부분은 오래된 도시의 성벽 안에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 가운데서도 가장 눈부신 걸작이

바로 시에나 대성당일 것이다.

고딕 건축 양식을 보여 주는 훌륭한 본보기로, 독특한 토스카나-이탈리아적 특성이 가미되어 있다.

이 자리에는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가 있었으나, 오늘날 볼 수 있는 성당은 본질적으로 13세기에

세워졌다.

내부의 다양한 기둥과 벽을 뒤덮고 있는 검정과 흰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스트라이프 무늬가 주요한 특징이다.

1284년경부터 시작되어 크게 두 단계를 거쳐 건설된 성당의 파사드는 특히 훌륭하다.

파사드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일류 예술가 조반니 피사노가 설계했으며,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매혹적인데,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현존하는 이탈리아 스테인드글라스에서 가장 오래된 예 중 하나다.

 

산 조반니 세례당

 

산 도메니코 성당

 

토스카나 와이너리( Tenuta Torciano Winery)

'테누타 토르시아노 와이너리'는 1720년에 세워져 무려 13대 동안 계승되고 있는 유서 깊은 와이너리다.

역사가 긴 만큼 그 규모 또한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토스카나의 대표 와인 키안티(Chianti),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Nobile di Montepulciano) 등 수많은 종류의 와인을

테스팅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이 곳에서는 포도밭이 이루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야외 테라스나, 오크통이 가득한 중세 분위기의 와인 저장고에서

파스타, 리조또, 라자냐, 스테이크 등 이탈리아 정통 음식들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고급스러운 미식여행을

완성할 수 있다.

 

한병에 100유로가 넘는 비싼 것 부터 여러가지의 와인을 맛 보여 주었는데

VERNACCIA S. GIMIGNANO 화이트 와인이 제일 입에 맞아서 한 병 주문...

식사도 훌륭했다.

 

라벨에 에 저 수탉이 새겨진 것이 상급 와인인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으로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의

아주 작은 지역에서 생산되며, 황금색 바탕에 검정 수탉이 그려진 인장으로 구분한다.

 

피렌체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토스카나주의 주도로 주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이 도시는 이탈리아 관광과 산업의 중심으로 국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렌체는 중세 유럽 무역·금융의 중심지로 당대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많은 학자들이 르네상스의 발상지로

여기며 ‘중세의 아테네’로 불리기도 한다.

 

피렌체는 기원전 59년 로마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수비대 주둔지로 건설했다.

도시의 원래 이름은 라틴어로 ‘흐름’을 뜻하는 플루엔티아(Fluentia)로 2개의 강 사이에 건설된 데서 유래했다. 

이 도시는 로마와 이탈리아 북부를 잇는 가도 비아 카시아(Via Cassia)와 비옥한 아르노(Arno)강 계곡 근처에 자리잡은

덕분에 3세기 무렵 상업적 요지가 됐다.

피렌체는 774년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에게 정복당해 루카(Lucca)를 수도로 하는 토스카나 공국의 일부가 됐다. 1000년경 토스카나 공국을 통치하던 우고 후작(Margrave Hugo)이 루카 대신 피렌체를 거주지로 택하면서 피렌체

미술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피렌체는 무역과 금융업이 융성한 중세 콤무네(commune: 도시국가)로서 오랜 기간을 거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됐다.

14~16세기 유럽과 세계에서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으로 꼽히는 메디치가가 피렌체 역사에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는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정치와 문화를 막후에서 지배했다.

또 16세기 초의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테 7세가 이 가문 출신이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erina de' Medici)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결혼했고, 1559년 왕이 사망한 후

30년 동안 섭정으로 프랑스를 통치했다.

마리아 데 메디치(Maria de' Medici)는 프랑스의 앙리 4세 국왕과 결혼해 루이 13세를 낳았다.

메디치 가문은 1569년 코시모 1세(Cosimo  de' Medici)를 시작으로 1737년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Gian Gastone de' Medici)가 사망할 때까지 토스카나 대공으로 군림했다.

의약업과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은 당시 피렌체에 거주하던 천재적인 예술가와 학자들을 후원하며

그들에게 작품과 연구를 의뢰했다.

이것이 르네상스의 시초가 됐다. 당시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은 인물로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보티첼리(Botticelli) 등 미술가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현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등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럽에서 문학·음악·과학·종교·정치·탐험이 번성했는데 일반적으로 피렌체는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곳으로 여겨진다.

 

 

버스에서 내려 산타 크로체 광장으로 가는 길

 

산타 크로체 광장

프란체스토회의 야외 설교 공간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며 '산타크로체 성당' 바로 앞에 조성된 광장으로,

현재는 성당을 보러 온 카톨릭 신자들, 여행자,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로 항상 붐빈다.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of Santa Croce)

14세기에 지어졌고,건설은 이탈리아 로마와 피렌체에서 활동한 건축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맡았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는 산타 크로체 성당 이외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성당과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 등을 지은 당대의 유명 건축가였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는 산타 크로체 성당을 짓던 시기 사망했다.

1333년 피렌체를 뒤흔든 홍수와 전염병 등이 겹치면서 공사는 더욱 늦어졌다. 공사는 14세기 후반에서야 끝났다.

베사리오네(Bessarione, 1403~1472) 추기경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Papa Eugenio IV, 1383~1447)

가 지켜보는 가운데 1443년 성당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성당의 아름다운 전면부는 19세기 새로 만들었다. 전면부 공사는 이탈리아 건축가 니콜로 마타스(Niccolò Matas, 1798~1872)가 맡았다.

 이탈리아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 이탈리아 정치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 등 피렌체 출신 유명인들의 묘가 있다.

 

성당앞의 단테 동상

 

시뇨리아 광장으로 이동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이 접해 있는 광장으로 13~14세기에 조성되었으며, 중세 이후 지금까지 시청사로 쓰이고

있는 베키오 궁전과 더불어 역사 깊은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베키오 궁전 앞의 대광장에는 첼리니(Cellini)의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넵투누스 분수>와 코시모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복제품 등이 있다.

넵튠분수 옆의 돌바닥에 박혀 있는 둥근 금속은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가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다 화형에 처해진 곳을 표시한 것이다.

 

Cosimo I de' Medici동상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교황의 인정을 받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토스카나 대공국을 지배했다.

냉혹한 독재자였지만 피렌체를 강력하고 부강한 나라의 수도로 만들기도 했다.

 

Loggia dei Lanzi

로자데이란치(Loggia dei Lanzi)는 베키오 궁 근처에 있는 옥외 조각 갤러리로 3개의 커다란 아치가 있는 회랑형의 건물로 15개의 조각상이 있다.

1376-1382년에 치오네와 탈렌티가 세웠다. 원래는 코시모 1세 용병들이 대기하는 장소였다.

 

벤베누토 셀리니의 메두사의 머리를 가진 페라세우스 상

페라세우스는 다이에와 제우스의 아들이고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같은 괴물인데, 고르고네스 3자매 중 한 명이다

왼쪽 뒤의 상은 피오 페디의 '폴리세나 강간'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안은 메넬라오스.

 

사빈 여인의 강간

 

넵튠분수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조각상이 있는 분수

이탈리아 조각가 '바르톨로 메오 암만나티'가 설계하였고, 4.2m높이의 거대한 상

흰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넵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신들의 조각상들은  청동으로 만들어 졌다.

당시 피렌체의 대공작이었던 '코시모 1세'의 주문으로 만들어 졌는데, 넵튠의 얼굴이 주문자와 비슷하다고...

1574년 완공 이후 여러 번의 도난과 손상을 입어, 현재는 1800년대에 만들어진 복제품이 서 있다.

 

베키오궁,우피치미슬관

 

베키오 궁

마치 요새와도 같은 피렌체의 시청사는 조각가이자 건축가이기도 했던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년경~1310년)의

작품으로 원래는 피렌체를 지배했던 수도원 세력의 이름을 따서 팔라초 데이 프리오리라고 불렸다.

팔라초 베키오는 반대 세력인 우베르티 가로부터 몰수한 땅에 세워졌으며, 그리하여 내부의 라이벌을 제압할 수 있는

시 정부의 힘을 건축으로 표현하고 있다.
매우 거친 러스티케이션의 피에타 포르테(pietra forte, '강한 돌'이라는 의미)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높은 창문,

눈에 띄는 시의 문장, 그 위에 총안을 설치한 돌출한 발코니는 마치 군대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종탑 꼭대기에는 건물 전체의 형태를 미니어처로 제작해 놓은 것 같은 종루가 있으며, 정청 앞에는 높은 석조 연단이 있어 이곳에서 정부 지침을 시민들에게 공표한다.

방어용 외벽 뒤로는 세련된 르네상스 풍 궁전이 메디치 궁의 그것을 닮은 아케이드 정원을 중심으로 서 있다.

이는 1450년경 점차 피렌체 시정에 영향력이 커지게 된 메디치 가가 주도한 재정비 덕분이다.

메디치 가는 자신들이 뽑은 건축가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1396~1472년)가 건축 감독을 맡도록 하였다.

안뜰 너머에는 각종 정부 사무실이 미로처럼 잇달아 자리 잡고 있었지만 1500년대 중반 피렌체의 통치자가 된

메디치 가의 궁전으로 쓰이기에 알맞도록 탈바꿈했다.

 

우피치 미술관

1559년 메디치 가문에 의해 피렌체 시의 관청(uffici)으로 건설되었다. 조르조 바사리에 의해 설계된

이 건물은 후에 미술관으로 개조되었으며, 세계 최고의 르네상스 박물관으로 수많은 그림과 조각 등을 소장하고 있다.

ㄷ자 모양의 건물로 2, 3층의 총 45개의 방에 25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보티첼리의 <봄>, <비너스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 등 유명한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다.

 

다비드 복제 상

 

피렌체 대성당

브루넬레스키의 유명한 돔 지붕이 얹혀 있는, 한때는 세계 최대였던 성당

두오모, 혹은 피렌체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바실리카는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에 뒤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그러나 이 바실리카가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3만 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피렌체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배력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성당을 짓는 작업은 1296년에 시작되었으나, 축성을 받은 것은 1436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화려한 녹색과 붉은색, 흰색의 대리석 파사드, 르네상스 거장들 그림과 조각 작품 컬렉션,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돔 덕분에 명성이 높다.

이곳은 또한 1439년부터 피렌체 의회가 있었으며, 종교 개혁가이자 '허영의 소각'(죄가 된다고 여겼던 사치품과 이교도적인 미술품, 책 등을 공개적으로 불태운 사건)의 주동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설교를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성당에서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다. 1478년 피렌체의 공동 통치자였던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라이벌인 피사의 대주교와 교황 식스토 4세가 보낸 이들에게 찔려 숨졌던 것이다.

그의 형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위대한 로렌초' 역시 칼에 찔렸으나, 무사히 몸을 피했고 이후에는 대주교를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오래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부지에 세워진 이 성당의 건축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로 시작하여 여러 건축가들이

맡아 보았다.

1331년 작업을 총괄하기 위한 협회가 창설되었고, 1334년에는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토가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건축가 안드레아 피사노가 조수를 맡았다. 1337년 조토의 사망 후 여러 명의 건축가가 감독을 맡았으며,

원래의 계획을 확장하고 돔을 짓는 쪽으로 설계했다.

1418년 돔을 건축할 디자이너를 찾기 위한 공모전이 열렸다.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선발되었다.

그의 혁신적인 설계는 발판이 필요 없이 스스로 지탱되는 돔을 낳았다.

돔은 1436년에 완공되어, 독창적인 걸작으로 남아 있다.

 

유물 수선소

 

단테 생가

이탈리아 중세를 대표하는 시인 단테(1265~1321)가 태어난 집이다.

단테 알리기에리 거리(Via. Dante Alighieri)에 있으며, 내부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13세기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피렌체 골목길

 

저녁식사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하는 빡센 일정으로 5일만의 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