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2017.08.16일 자전거 나라 노틀담성당, 루브르, 개선문투어

갯바우2 2017. 8. 24. 16:30


7시 기상하여 호탤 제공 조식(1인당 12유로) 후

8:50분 생미셸 분수대 광장(Fontain St. Michel)에서 가이드 미팅


생미셸 분수대 조각상

1860년 만들어졌으며 조각상의 주인공은 나폴레옹3세로

악마를 발 아래 누르고, 신의 계시를 받은(왼쪽 손가락) 나를 따르라!(오른쪽 칼)라는 의미라고


피아노 바

술집인데 공연 예술도 열린다고


재즈바

영화 ' 라라랜드 ' 의 일부를 촬영했다고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 Company)

영화 ' 비포 선셋 '을 촬영한 곳이며, 주인공 제시와 셀린이 만나는 곳으로

무려 100년이나 된 서점으로 헤밍웨이도 즐겨 찾던 곳이라고...


노틀담 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Paris)

유럽 최고의 고딕 양식의 결정체라고 일컬어 있으며,

1163년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파리 주교에 의하여 건축되기 시작한 이 성당은 약 3세기에 걸쳐 완공되었으며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현재의 성당 모습은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인 "NOTRE-DAME DEPARIS"가 1813년 출판된 후에 전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후

많은 지식인들을 자극시켜 복원 공사를 진행한 후의 일이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어 19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곱추 카지모도와 에스멜라다의 사랑을 그린 빅토르 위고의 명작 빠리의 ' 노틀담 대성당 '의 무대

정면에는 두개의 종탑과 장미창 그리고 입구에 3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의 출입문은 정면으로 바라보아 왼쪽이 로마군에 의하여 목이 잘린 성자 드니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성모 마리아의 문,

가운데는 예수님과 12제자의 모습을 조각해 논 최후의심판문,그리고 우측에 성녀 안나의 문이 있다.

또한 성당 내부에는 고딕 건축 양식의 꽃이라고 불리는 스테인글라스 장미창은 예술의 극치를 달리고 있으며

직경만 해도 13미터나 된다. 이 창은 햇빛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에 의하여 시시각각 변하여 신비의 색깔이라고 한다.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건축가 비올레 르 뒤크에 의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불어 ' Notre-Dame ' 은 ' 우리들의 부인 ' 이란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단어













포엥제로(Point Zero)

노틀담 성당의 광장인 파비스 광장에 있으며

파리의 기준점으로, 이것을 밟으면 언젠가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설도 있다


샤를마뉴(Charlemagne 불어이며 샤를대제를 의미)기마상
프랑크제국의 황제로

샤를마뉴는 재위기간 중 열 차례의 큰 전쟁과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으며, 그 결과 프랑크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려 놓았다.

서유럽에서 영국,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전부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특히 무려 33년 동안 계속된(772~804) ‘작센 전쟁’의 결과 그때까지 유럽 문명권의 바깥에 있었던 게르만족의 상당수가 유럽에 포함되었고,

그것은 이후 유럽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또한 8년 동안 계속된 훈족(아바르족)과의 전쟁으로 헝가리 지역이 정복되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등 지배지였던 곳에 샤를대제의 기마상들이 있다.


생트샤펠(Saint Chapelie), 생샤펠성당

최고재판소(La Palais de Justice)정면의 좌측


최고재판소(La Palais de Justice)

프랑스 파리의 중앙 시테 섬(Île de la Cité)에 위치하고 있는 프랑스 최고의 사법 중심지이다.

이곳은 과거 루이9세(Louis IX, 1214~1270)의 궁전이 있던 자리였다.

샤를5세(Charles V, 1337~1380)의 명으로 궁전이 마레지구로 옮겨지기 전까지 이 곳은 도시의 중심이자 프랑스 왕권의 상징이었다.

16세기부터 프랑스 혁명기 전까지는 왕실 법정으로 사용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때에는 혁명재판소로 사용되며 수많은 정치 재판이 이루어졌다. 이 거대한 사법 건물은 몇 차례 화재로 파손과 재건축을 반복했다. 현재 건물은 20세기에 대대적으로 보수된 것으로

여전히 법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최고 재판소를 비롯하여 다양한 재판 관련 기관과 사무실 등이 들어와 있다.

건물 곳곳은 사용되었던 용도에 따라 ‘상인의 복도’, ‘재판장의 복도’, ‘기다리는 방’, ‘죄인의 복도’ 등의 이름이 붙어있다.

로 옆에는 13세기에 지어진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콩시에르쥬리(La Conciergerie)

파리 시테섬의 서쪽, 노트르담 사원 근처에 위치한다.

필리프 4세에 의해 1284년에서 1314년에 파리 최초의 궁전으로 처음 건축되었고, 왕실 전용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후에 건물을 증축하여 왕실의 연회를 개최하는 연회실과 재판정으로 사용되었고, 

가드룸(Guardroom)은  왕이 입회하는 의회의 개회시에 대기실로 사용되었다.
1358년 궁전을 루브르로 옮긴 후 의회와 국왕의 중앙집행부로 사용되었으며 1391년부터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중세에 건축된 시저타워(Caesar Tower), 실버타워(Silver Tower), 봉벡타워(Bonbec Tower)가 남아 있다. 실버타워는 왕실 보물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봉벡타워는 시계탑으로, 1370년 처음으로 시계가 설치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시계는 1535년에 설치한 것이다.
공포정치 기간동안에는 콩시에르제리는 재판정으로서 단두대로 가는 대기실로 사용되었고

1793년부터 1795년까지 약 2600명이 이곳의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시인 셰니에(Andre Chenier),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인 당통(Georges Danton)을 포함한 지롱드당원 등도 이곳을 거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정으로 향할 때 생루이 방(Salle Saint-Louis)를 지나게 되어 이 방은 '불운의 방(Salle des Perdu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세기 부르봉 왕조의 부활 후에는 고위층을 위한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나폴레옹 3세도 이곳에 수감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감되었던 방은 루이 18세에 의해 왕비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예배당으로 개조되었다.

19세기 중엽 콩시에르제리와 재판소의 외관은 공포정치의 산실이라는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축을 하였다.
1914년부터 감옥으로서의 사용을 중지하고 국립 역사기념관으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고 오늘날 인기있는 관광명소다. 

일부는 현재까지 파리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재의 건물은 과거에는 루브르 궁전(Palais du Louvre)이었으며,

12세기 필립2세에 의해 건축된 요새가 그 시초가 된다. 앵글로노르만 족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립 2세는 이곳에 외벽과 탑, 내부 건물로 이루어진 요새를 지었고, 도시가 점점 커져 더 이상 루브르 요새 만으로 파리를 보호하기 어려워지게 되자,

14세기 후반 샤를 5세는 파리 주변에 거대한 새 성벽을 쌓고 건축가, 탕플(Raymond du Temple)에게

루브르를 왕실 거주지로 개조할 것으로 명하게 된다.

초기 루브르 궁은 임시 거처에 불과했고, 본격적인 왕궁으로 변모한 것은 프랑수아 1세에 의해서였다.

루브르가 궁전에서 박물관으로의 탈바꿈을 시작한 건 1682년. 루이 14세가 처소를 베르사유 궁으로 옮기면서 루브르는 왕실의 예술품을 보관, 관리, 전시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면서부터다.

1692년, 루브르 안에 ‘왕립 예술아카데미’가 세워졌으며, 이는 그 후 100년 동안 루브르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왕실의 예술품들을 보존 관리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예술가들을 교육, 배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루브르가 본격적인 박물관으로서 변모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93년 8월 10일, 537점의 회화 작품을 전시하면서 일반인들에게 박물관으로서 그 모습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예술품들은 약 38만점이며, 8개 부문으로 나뉘어 전문가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8개 부문: 이집트 유물; 근동 유물, 그리스, 에투루리아, 로마 유물; 이슬람 미술; 조각; 장식미술; 판화와 소묘).

루브르 박물관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74년. 동쪽으로는 쉴리(Sully) 관과 카레 궁정(Cour Carree), 구 루브르 궁, 북쪽으로는 리슐리에(Richelieu) 관과 드농(Denon) 관, 나폴레옹 궁정(Cour Napoleon)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세느 강과 접하고 있어 직사각형에 가까운 구조이다. 한편 루브르의 주 정원인 나폴레옹 궁정으로 나 있는 새 입구에 세워진 유리 피라미드는, 1988년 10월 15일에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I.M. 페이(Pei)에 의해 기획, 설치가 시작된 현대적인 구조물로서 유리 피라미드와 지하 단지로 이루어져 있다. 프랑스 정부의 ‘그랑 루브르’ 계획 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1993년에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역피라미드(The Inverted Pyramid)로 완성되었다.

루브르의 주 전시관인 리슐리외(Richelieu) 관, 쉴리(Sully) 관, 드농(Denon) 관은 ‘ㄷ’자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관람객들은 반지층, 1층, 2층을 오가며 관람할 수 있다. 회화는 드농 관 1층과 쉴리 관과 리슐리외 관 2층에 주로 전시되어 있고, 고대 유물들은 드농 관 1층, 쉴리 관 1층, 리슐리외 관 반지층 일부, 쉴리 관 남쪽 전시실 1층에서 관람할 수 있다. 조각 작품은 드농 관과 리슐리외 관에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드농 관에는 이탈리아 조각 작품이, 리슐리외 관에는 프랑스 작품들이 있다.


함무라비 법전비

B.C. 18세기의 작품으로 현무암 재질이며, 엘람(이란)의 고도() 수사에서 1901~02년에 프랑스의 조사단에 의해서 발굴됨

바빌론의 아모리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가 정한 법을 세겨둠, 세께최초의 성문법으로 알려짐

본래 시파르에 세워져 있었는데, B.C. 12세기에 엘람왕 슈트루크 나훈테(Schutruk-Nakhunte)가 전리품으로서

수사로 가져온 것이다.

석비 상부의 우측은 옥좌에 걸터 앉은 정의의 신() 샤마쉬, 좌측에는 함무라비가 서서 법전을 수여받는 정경이 부조되어 있다

잔다르크 동상


방패와 투구, 중세


갑옷, 중세


샤를9세의 투구와 방패


융단 장식들


루이14세 초상화


루이14세 보석함


고대의 화려한 장신구들





대리석 보석함


아폴론 갤러리

1661년 화재 이후 건축가 르 보는 소갤러리 상위 부분을 재건하여 아폴론 갤러리를 설치하였다.

왕정의 보물들, 왕관, 왕관 모양의보석 장식, 석재 꽃병, 140캐럿 다이아몬드 소재의 유명한 ' 레이전드 '왕관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폴론 갤러리의 보석들

나폴레옹 1세 황제의 두번째 부인이며,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의 황녀인 마리 루이즈에게 선물한 목걸이 귀걸이세트

목걸이와 머리띠 장식의 왕관, 빗, 귀걸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려입 모양의 다이아몬드와 아름다운 에메랄드를 번갈아 세팅하였다.







사모트라케의 니케(Victoire de Samothrace, or Nike de Samothrace)) 

일명, 날개를단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Winged Victory of Samothracee)

그리스 여신 니케를 형상화한 이 조각상은 기원전 190년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1863년 사모트라케 섬의 신역 한쪽 구석 바위의 감(, 사원에 있는 탑 아래에 장치된 감실)에서 발견된 헬레니즘 기의 대리석니케 상으로,

발견 당시,100개가 넘는 토막들로 흩어진 돌덩어리들을 발굴해 모아 온 것을 지금의 형태로 복원하였으며,

16년 뒤에는 니케가 서 있던 선수()부분이 발견되었고 또 다시 1950년에는 오른손이 발견되었고,

여신의 두 팔과 머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머리 부분이나 양 팔은 없어졌으나 오른손을 들고 왼손은 내려 올림포스에서 뱃머리로 내려서려는 찰나의 여신의 움직이는 모습과

옷자락의 힘차고 다이내믹한 표현이 극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

B.C. 191~ B.C.190년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 (Antiochos Ⅲ, 재위 B.C.223~B.C. 187)와 벌인 해전의 승리를 감사하여, 로도스 섬 사람이 이곳에 봉납한 것이라 추정된다. 


밀로의 비너스(Vénus de Milo)

고대 그리스의 조각으로, 멜로스의 아프로디테(Aphrodite of Melos)라고도 한다.

1820년 4월 8일 에게해에 산재하는 키클라데스제도의 하나인 밀로스섬(밀로섬 또는 멜로스섬이라고도 한다)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 근방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

마침 이 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이것을 입수하여 다음해 리비에르 후작의 손을 거쳐 루이 19세에게 헌납되어

왕명으로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여신은 앞으로 내민 왼발을 약간 위에 올려 놓고, 오른쪽 발에 체중을 싣고 서 있다. 하반신은 옷으로 가려졌고 상반신은 나체이며

두 팔은 없어졌다.

발견 당시는 B.C.5세기의 원작이라 했으나 현재에는 B.C.5세기 후반의 아프로디테를 표본으로 B.C.130~ B.C. 120경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대리석, 높이 2.02m

이 작품은 아름답고 완벽한 균형을 가진 몸매로 인해 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는데.  몇 가지 이유가
첫째는 몸의 뼈대와 근육을 표현한 완벽한 해부학의 도입이다.

둘째는 몸의 무게 중심을 한쪽 다리에 둠으로써 나타나는 S자 곡선이다. 이 곡선이 인간의 신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다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이다.

셋째는 팔등신()의 신체구조이다. 팔등신은 키가 머리 길이의 8배를 이루는 몸을 말하는 것으로 이른바 황금 비율이라 부른다.

이 비례법은 특히 여체를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신체 비율로 알려져 있다.



루브르 입구의 유리 피라미드



Cafe De La Regence에서 점심식사



프랑스 파리 국참사원(Conseil d'Etat )

공공행정에 관련되는 사안에 대한 프랑스의 최고행정재판소이다.


파리시 청사(Hôtel de Ville)

파리시청과 센현청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행정 업무를 보는 장소이다.

원래 시청사는 샤틀레(Châtelet) 광장에 있었으나, 1357년 약간 동쪽으로 이전하여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

1871년 파리 코민때 화재로 전소되었지만 1882년에 원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건물 중앙에 있는 시계 밑에는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 '자유, 평등, 박애' 3단어가 새겨져 있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Opéra de la Bastille)

프랑스 파리 12구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에 자리하고 있는 현대식 오페라 공연장이다.

이곳은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에 이어 생긴 새로운  오페라 공연장으로 파리의 손꼽히는 명소 중 하나이다.
1960년대부터 프랑스 파리에서는 값이 비싸고 시설이 낙후된  오페라 가르니에를 대체할 대중적인 현대식 오페라 공연장에 대한 욕구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1981년 선거에 승리한 프랑스 사회당 좌파 정부는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오페라의 대중화를 내걸고 새  오페라 극장 건설에 나섰다.

700여명 이상의 쟁쟁한 건축가들을 재치고 캐나다 신예 건축가 카를로스 오트(Carlos Ott, 1946~)가 건물 설계자로 선택되었다.

오랜 논의 끝에 혁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바스티유(Bastille)를 건물 부지로 결정하였다.

1984년부터 대대적인 공사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1989년 7월 14일  오페라 바스티유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200주년을 맞이하여 개장하였다.

개장되고 1990년 3월 17일 정식으로 열린 첫공연은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 >이었는데 한국인 지휘자 정명훈(, 1953~)이 음악 총감독을 맡았다.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습격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다.

1789년 7월 14일, 성난 군중이 모여들어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몰려가면서 역사적인 혁명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원래 바스티유는 영국과의 백년 전쟁이 한창이던 14세기에 파리의 동쪽을 지키기 위한 성채로 지어졌다.

이후 루이 13세 때 재상이었던 리슐리외가 이 성채를 감옥으로 사용하면서 정치적인 정적이나 사상범들을 주로 수감하기 시작했다.

테르나 미라보 등 유명 사상가나 정치인들도 수감된 적이 있다.

바스티유 감옥은 혁명 시기에 철거되어 현재는 그 모습이 없다.

습격 사건이 벌어졌던 7월 14일은 혁명 기념일이 되었고, 바스티유는 광장의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다.

대신 광장 중앙에는 1830년의 7월 2차 혁명을 기리는 높이 52m의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 아래에는 7월 혁명과 1948년 2월 혁명의 희생자들이 안치되어 있다.


마레지구

파리의 제3구와 4구에 걸쳐 있는 마레 지구는 도시의 심장부를 발견할 수 있는 풍부한 기회를 제공한다.

원래 습지대였던 이곳은 (marais는 "늪"이라는 뜻이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파리의 귀족들이 살았고,

이후에는 노동자와 수공업자의 거주지가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유대인 거주 구역이 번성하였고, 현재는 대규모 중국인 공동체와

생기 넘치는 게이 문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마레 지구의 한복판에는 파리의 상징적인 광장이라 할 수 있는 보주 광장이 있다.



보쥬광장(Place des Voges)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으로, 잘 조성된 정원과 시원한 분수대 등은 파리시민들에게 평화로운 휴식처를 제공한다.

앙리4세가 1605- 1612년에 르네상스 스타일로 건립하였는데, 특히 완벽한 건축적 대칭성은 도시계획의 전형적인 예로 

이후 유럽의 많은 도시 거주지구의 모형이 되었다.

원래는 '왕가광장(Place Royal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보주현(Department of Vosges)이 1799년에 소유권을 양도한 이후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빨간 벽돌과 석재로 건축한 39개의 주택(아파트)이 있으며, 과거 대문호 빅토르 위고와 정치가 리슐리외 등이 이곳에 거주하였다. 

위고의 저택은 현재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반귀족주의 혁명을 상기시키기 위한 루이13세의 동상이 있으며, 아트갤러리, 레스토랑, 카페, 골통품점, 부티크, 서점 및

레코드 가게 등이 즐비하게 서 있다.




튈르리정원(Jardin des Tuileries)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브르 궁전까지 이어지는 대정원으로서, 동부는 지난 날의 궁전 터이고, 서부는 유명한 조원가() 르노트르가 설계한 프랑스식 정원이다.
튈르리는 ‘기와 공장’이라는 뜻으로, 기와 공장이 있던 자리에 앙리 2세의 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건축가 필리베르 들로름(1515∼1570)에게 명하여 1564년 궁전을 조영한 데서 비롯된다.

역대 왕실이 이를 확장하고, 설계도 바꾸어 보았으나 건축면에서는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때 - 스위스 루체른 빈사의 사자상 : 사암 바위에 조각된 사자상.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때 파리의 튈르리 정원을 지키다 전멸한 스위스 용병 786명을

                                                                  추모하기 위해 1821년 덴마크 조각가 토르발센이 조각했는데 죽어가고 있는 사자의

                                                                  부조상과 더불어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와 함께 병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창을 맞아 죽어가는 사자의 고통스러운 표정은 매우 사실적이다

 


군중에게 손상을 입었으나 왕정복고와 함께 복구하여 왕가의 주거로 삼았다.

그러나 1871년 파리 코뮌 때 불이 나서 루브르궁()에 이어져 있는 2개의 동쪽 날개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되었다.

정원은 중앙부에 8각형과 원형의 연못을 연결하는 프롬나드가 있고, 여러 곳에 신화나 역사와 관련 있는 조각이나 화단을 배치하여 지난 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오벨리스크(L'obélisque)

파리 한복판에 위치한 유서 깊은 광장.

센 강 오른쪽 기슭의 샹젤리제 거리와 튀르리정원사이에 펼쳐져 있으며 역사뿐 아니라

위치, 규모 면에서 파리시내의 수많은 광장들 중에 가장 뛰어나다. 

서쪽으로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문에 이르는 광대한 전망이 펼쳐지고, 그 반대 방향으로는 튈르리 정원과 루브르 궁전의 우아한 경관이

보인다. 북쪽으로 마들렌 교회, 남쪽으로 앵발리드 방면의 전망도 아름답다.

콩코르드 광장은 파리 중심가의 유명 관광지일 뿐 아니라 프랑스 역사상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곳이다.

팔각형으로 구획된 이 광장은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장식하기 위해 1755~1775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당시에는 ‘루이 15세 광장’이라 불렸으며, 1770년에는 왕세자(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광장의 역사는 피로 얼룩지게 된다. 1792년에 기마상이 파괴되고 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바뀌었다.

다음 해인 1793년에는 단두대가 놓여 왕족과 귀족, 성직자 등 1343명이 처형당했다.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혁명가인 로베스피에르와 당통마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단두대가 있던 자리에는 분수대가 생겼다.
1795년 비로소 공포 정치가 끝나고 광장의 명칭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아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로 바뀌었다.


오벨리스크(L'obélisque)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돌로 된 사각주(). 이집트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태양신을 상징하는 긴 거석()으로 석주형()의 사면 방첨탑()이다. 피라미드형의 정상에는 황금판이 씌워져 있고, 본체와 기대의 표면에는 봉헌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헤리오폴리스의 레 신전의 성석()을 모방한 것.

제5왕조(기원전 2494~2345경)의 국왕들은 돌로 쌓은 오벨리스크를 신체()로 하는 태양신전을 건립하고,

돌기둥 형태의 것은 제12왕조(기원전 1919년경 이후) 이후부터 신전 내에, 신왕국 시대(기원전 1567~1085년경)에는 필론 앞에 한 쌍씩 세웠다. 대부분 아스완 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후에 아시리아 왕과 로마 황제에 의하여 반출되고 현재 이집트 국내에 서 있는 것은

5기에 불과하다.
로마제국 시절에는 많은 오벨리스크가 로마로 옮겨졌다.

그리고 르네상스기간에는 오벨리스크를 새롭게 조명하여 기념물과 건축 장식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런던, 파리, 로마, 이스탄불 및 뉴욕 등의 광장과 공원에도 19세기에 이집트로부터 반출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콩코르드 광장 중앙에는 1833년 이집트의 총독이었던 무하마드 알리 파샤가 루이 필리프 왕에게 선물한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 때 제작된 것으로 룩소르의 신전에서 옮겨왔는데,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3m에 달하며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오벨리스크의 좌우에는 로마의 산 피에트로 광장을 본뜬 분수가 있으며, 8개의 모퉁이에 코르투아 플라디에가 만든 여신상이 놓여

 광장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 여신상들은 각각 마르세유, 낭트, 리옹, 보르도 등 프랑스의 8대 도시를 상징한다.





개선문(Arc de Triomphe)

에투알 개선문은 높이 51미터, 너비 45미터의 세계에서 가장 큰 개선문이다.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에서 영감을 받은 이 개선문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1806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승리한 뒤

프랑스 군대의 모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게 한 것으로, 이후 전 세계에 국가나 승전 기념비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마름돌을 사용한 디자인은 볼트식 통로의 단순한 아치로, 꼭대기에는 다락이 있으며, 네 개의 기둥에 새겨진 우의적 부조를 비롯한 다양한 도상을 볼 수 있다.
장-피에르 코르토의 <나폴레옹의 승리, 1810>은 월계관을 쓰고 토가를 입은 황제 나폴레옹이 트럼펫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 도시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또 앙투안 에텍스의 부조도 두 점 볼 수 있다. 말을 탄 인물과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 하는 벌거벗은 병사, 그리고 그를 보호하고 있는 미래의 영혼을 묘사한 <저항>, 로마 신화의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의 보호를 받는 전사가 농부들에게 둘러싸여 칼을 칼집에 꽂는 장면을 표현한 <평화>가 그것이다. 프랑수아 루드의 <1892년 자원병들의 출정>은 전쟁의 여신 벨로나가 이끄는 알몸의 애국자들이 프랑스의 적들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볼트에는 프랑스 공화정 시대와 나폴레옹 치하에서 벌어졌던 128건의 전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다락은 서른 개의 방패로 장식되어 있으며, 각각의 방패에는 전투의 승리가, 그리고 안쪽 벽에는 이 전투에서 전사한 용사들과 558명의 프랑스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에투알 개선문은 1920년 제1차 세계대전 휴전기념일, 한 무명용사가 이곳에 안장된 후 국가 통합과 화해의 상징이 되어 왔다. 오늘날 무명용사 기념비 앞에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기념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샹제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에서 가이드와 작별



저녁식사를 위해 다시 샹제리제 거리로


Le Bistro Marbeuf에서 저녁식사






개선문 야간투어

입장권




처음부터 끝까지 나선형 계단을 수직으로 50m를 올라가야....

개선문에서 내려다 본 샹제리제 야경

멀리서 본 에펠 탑 야경

루브르 야갼투어

예술의 다리(Pont des Arts) : 루브르와 라디오 방송국(Canal Académie)을 연결하는 다리

루브르 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