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2018.08.12 여름궁전(페트로 드보레츠), 에르미타쥐 박물관, 성 이삭성당, 발레 백조의 호수

갯바우2 2018. 8. 22. 10:44


호텔 조식 후, 페트로드보레츠의 여름궁전, 에르미타쥐 박물관, 성 이삭 성당 관광, 석식 후 발레 '백조의 호수' 관람


러시아의 역사


러시아의 고대사는 다른 국가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민족 이동과 고대 왕국의 역사이다.

바이킹의 일파인 루스(Rus)족이 라도가 호수변에 건설한 요새에서 시작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대략 바이킹 등의 북유럽인들과 현지 슬라브인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전한다.

오늘날의 나라 이름인 러시아(rus+sia)도 루스족에서 유래했다.


초기 러시아는 하나의 ‘러시아’라기보다는 몇몇 도시의 집합체로 존재하다가 이후 점진적으로 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13세기 중엽 몽골족의 침입으로 키예프러시아가 붕괴되자(타타르의 멍에),

러시아인의 정치적 중심은 키예프 북동쪽에 해당하는 블라디미르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삼림지대로 옮겨갔다. 

처음에는 작은 세력에 불과하던 모스크바공국이 점차 주변의 여러 공국들을 병합해갔으며,

1480년에는 몽골족이 세운 킵차크한국의 지배를 벗어남에 따라 모스크바대공의 주권 아래 북동러시아의 정치적 통일이 달성되었다.

이것이 모스크바러시아 또는 모스코비예(Moskovie)이다.


러시아의 옛 이름인 ‘루시(Rus')’란 명칭은 모스크바 국가만 독점한 것이 아니라 일찍이 키예프러시아의 남서부에도 남아 있었다.

이 지역은 몽골의 침입을 받은 뒤 14∼15세기에 리투아니아(14세기 말 폴란드와 합병하여 통일왕국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형성)에

정복되었는데, 드네프르 강 상류지방은 벨로루시(백러시아)로 일컬어지고,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드네프르 강 중류 지방은 소러시아로 불렸다. 백러시아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도 정설이 없다. 서유럽에서 모스크바러시아를 포함하여 여러 지방을 백러시아로 부른 적이 있다.

현재와 같이 정착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 부터이다.

소러시아는 모스크바국가인 대러시아에 대한 명칭인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정교회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소러시아는 백러시아처럼 정치적으로 독립한 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고,

한때 카자흐가 세력을 떨치던 시기에는 ‘카자흐의 땅’, ‘헤트만(카자흐의 두령)의 땅’으로도 불렸다.

이 지방에 대해서 ‘변경’을 뜻하는 우크라이나(Ukraina)라는 호칭이 확립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이다.


드네프르 강 왼편의 우크라이나는 17세기에 폴란드의 지배를 벗어나 모스크바 국가에 병합되었으나

서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는 18세기 후반에 와서 러시아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3세기 이후의 정치적 분열기에 지난날의 동슬라브(루시)의 민족적 통일은 상실되어 일정한 공통성은 유지하면서도

서로 다른 언어와 습속을 가진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백러시아인 등 세 민족으로 성립되었던 것이다.
가장 오래된 연대기에 기록된 9∼10세기 동슬라브민족들의 거주지는

북쪽으로는 노보고로트를 중심으로 하는 볼호프 강, 로바치 강 등, 두 강의 수계유역,

남쪽으로는 키예프를 중심으로 하는 드네프르 강의 상류와 중류, 그리고 볼가 강 상류를 합친 지역이었다.

그런데 11∼13세기의 키예프러시아시대에 이르러 핀계 민족이 전부터 살고 있던 블라디미르, 수즈달과 그 오지의 삼림지대로

러시아인들이 많이 이주해 있었다.
13세기 중엽에는 몽골족의 침입을 받았다. 그리하여 북동부는 15세기 말까지 킵차크한국의 지배를 받았고,

남서부는 14세기에 발흥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편입됨에 따라 동슬라브인의 언어적 통일이 무너졌다.

이에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북동부에 러시아 민족이, 또 서쪽의 드네프르 강 중류에는 우크라이나 민족이,

그 북쪽 상류에는 백러시아 민족이 각각 형성되었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모스크바 대공국에 의해 러시아 민족의 독립과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졌고,

중앙집권국가 모스크바 러시아가 성립한 후로 눈부신 영토확장을 거듭하였다.

16세기 중엽에는 카스피 해에 이르는 볼가 강 하류 일대가 러시아인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왔고,

16세기 말까지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진출이 시작되어, 17세기 말까지 100년 동안에 전 시베리아가 러시아령이 되었다.

18∼19세기의 제정러시아기에는 발트해 연안, 우크라이나 전역과 백러시아 뿐 아니라, 폴란드와 핀란드 일부까지 확장되었고,

나아가서 흑해 북쪽 해안, 자카프카스, 중앙아시아, 극동연해지방까지도 러시아제국령이 되었다.

이같은 영토 대확장에 따라 러시아인들의 거주지역도 급속히 넓어졌고, 그만큼 자국 내에 수많은 이민족을 갖게 되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근대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서유럽으로부터 상당수의 전문가를 초빙한 것과 더불어

아시아와 유럽의 많은 민족들 사이의 활발한 문화적 · 경제적 교류와 인종적 혼혈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18세기 초부터 1917년 러시아 혁명까지의 러시아를 ‘제정러시아’라고도 한다.

정식으로는 1721년에 표트르1세가 ‘황제’, 즉 임페라토르(imperator)라는 칭호를 사용한 시기부터

1917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기까지를 말한다.

황실은 로마노프왕조이며, 수도는 페테르스부르크, 종교로는 동방정교(러시아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율리우스력()을 썼다.

인구는 1724년에 약 1,558만 명, 1812년에 약 4,270만 명으로 추정되며, 제국시대에 단 한 번 실시된 전국 국세조사(1897)에서는

1억 2,500만 명(그 가운데 러시아인은 5,560만 명)이었다.


제국의 역사는 18세기와 19세기로 나눌 수 있으며, 19세기는 다시 크림전쟁(1853∼1856)의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가 제정 말기가 된다. 18세기의 러시아는 군사기술에서 사상 · 풍속까지 유럽의 문물 · 제도를 흡수하였다.

계몽전제군주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어떤 의미에서는 모범적인 절대주의국가이자 유럽의 강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여제의 말년에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났고,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원정(1812년)이 있었다.

19세기 전반에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 1세가 절대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국제환경 속에서 대국러시아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이 충격으로 알렉산드르 2세 시대에 대개혁이 일어났다.



이 개혁으로 제국은 절대왕정에서 부르주아 왕정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이어 알렉산드르 3세 시대에 정치반동이 강화되어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시대가 시작되었다.

러시아 자체도 제정 말기에는 후진 제국주의 국가로서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했고, 1906년부터는 두마(국회)도 발족했지만,

이 시기는 1905년 혁명까지를 포함하여, 넓은 의미로는 러시아 혁명시대로 접어들었다.



로마노프 왕조


1613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를 지배한 왕조.


14세기 중엽에 모스크바에 온 프로이센의 귀족 A.I.코빌라가 먼 시조라고 한다.


그의 자손은 궁정에서 차차 세력을 넓혔으며,


16세기에 모스크바대공() 바실리 3세를 섬기던 대귀족 로만 유레프 때 그의 이름을 따서 로마노프가()라고 불렀다.


딸 아나스타시아는 뇌제() 이반 4세와 결혼하였으며,


조카인 표트르 니커티치 로마노프(나중의 총주교 필라레트)의 아들 미하일(재위 1613∼1645)이


1613년 젬스키 소보르(신분제 전국회의)에서 차르로 선출되어 불과 16세에 즉위함으로써 로마노프왕조가 시작되었다.

1682∼1696년까지는 이반 5세와 표트르 1세가 병립()하였다.


그 후에 표트르는 1721년 황제(임페라토르)라 자칭하였고, 러시아는 유럽의 열강()에 끼이게 되었다.


그와 여제 예카테리나 2세를 대제라 부른다.


마지막 황제는 니콜라이 2세이며, 3월혁명(구력 2월) 후 1917년 3월 2일에 퇴위했다가, 1918년 7월 16일에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 동안 이 왕조는 18대(병립을 각 1대로 친 경우) 304년간 존속하였다.



표트르1세


알렉세이의 14째 아들이다.


알렉세이 황제의 후처() 나타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0세 때에 궁중혁명()으로 크렘린에서 쫓겨나 모스크바 근교 프레오브라젠스코에 마을로 이사하였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으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건강하여,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력적인 방법으로,


러시아에 주류하던 외국인들로부터 포술() ·조선술() 등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 익혔다.


1682년 이복형() 이반 5세, 이어서 이복 누나 소피아와 병립()하여 정무()를 보다가,


소피아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1689년 정치의 실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1695년 돈강()의 하구()에 있는 터키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많은 외국인 기사()들을 초빙하는 한편


 전국의 장인()들을 소집하여 함대()를 편성하고, 이듬해 다시 터키를 공격하여 아조프를 차지하였다.


1697년에는 터기에 대한 서유럽 기독교국들의 동맹 체결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서유럽에 사절단(使)을 파견하면서,


자기 자신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변장하여 러시아의 군주로서는 최초로 서유럽 각국을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고,


스스로 직공()이 되어 포술 ·조선술 등을 익혔다.


그의 서유럽 여행은 본국의 총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음으로써 중단되었으나,


귀국 후 즉시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러시아인의 복장을 비롯하여 수염을 기르는 습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관습 ·풍속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다.


1700년 스웨덴과 북방전쟁이 벌어져 21년이나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니스타트의 화의()로써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을 손에 넣어 러시아가 목적한 바를 거의 달성하였다.


1721년 원로원()은 그에게 ‘임페라톨’(황제)이라는 칭호를 보내고,


또 ‘대제()’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로써 러시아의 절대주의왕정이 확립되었다.

1703년부터 네바 하구()의 삼각주에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를 건설하여,


이곳을 ‘유럽에 대한 창구()’로 사용함과 동시에 발트해() 지배를 위한 기지로 삼았다.

부국강병책()으로서 군사 ·행정 ·산업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그 대부분이 즉흥적인 착상에서 나온 것이고, 중심 사상이 결여된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운 14의 ‘관등표()’는 경찰제도와 함께 제정()이 몰락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Saint Petersburg - 피터의 도시.

러시아 제2의 도시다. 제정() 러시아 때는 페테르스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1914년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칭되었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라 불렀다. 그 후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 옛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그 이름은 도시의 수호자인 성 베드로(Peter)에서 따왔다지만, 동시에 이 도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바이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표트르1세(피터대제, Peter I the Great)는 러시아를 유럽의 제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도읍을 정한 곳이 발틱 해를 향해 있는 연안의 늪지대. 네바 강 하구의 음침한 섬들 위에 도시를 건설하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조소했다.

그러나 대제는 거침이 없었다. 1703년에 시작된 공사는, 대제스스로 오두막에 기거하며 관리들과 노동자들을 독려했다.

전 러시아에 석조 건축을 금지시키고, 모든 자재를 네바 강 하구로 실어오게 했다.

그리하여 100개의 섬, 수많은 운하, 365개의 다리로 이어진 북쪽의 베니스가 탄생했다.

도시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 구 소련시대에는 수십 년간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이제 다시 피터의 것으로 돌아갔다.

이곳의 가장 유명한 상징물인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은 대제의 위엄을 기린 조각상이다.

말을 탄 대제가 서 있는 돌은 전설의 '번개 맞은 돌(Thunder Stone)'로 무려 1500톤에 이르는데,

이것을 오직 인력만으로 6Km나 끌어 핀란드 만에 가져온 뒤 배에 실어 지금의 위치에 옮겨놓았다.


구(舊) 해군성, 겨울궁전, 대리석궁전과 에르미타주(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이 도시의 건축 유산은 전혀 성격이 다른 바로크 양식과 순수 신고전주의 양식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식 부페


아우디 Q7, 크라이슬러와 나란히 서있는 현대차


호텔 앞 거리



페트로드보레츠의 여름정원


페트로드보레츠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서쪽 23km 지점, 핀란드만() 동안에 있는 네바만() 연안에 위치한다.

휴양도시로서 철도의 종착지이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행정관할구역에 속해 있다.

1709년 건설되었으며, 1711년   표트르 1세가 건립한 궁전과 정원을 중심으로 발달, 1944년 이전까지는 표트르의 궁정을 뜻하는 페테르호프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궁정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떠 넓은 공원으로 둘러싸인 여러 개의 궁전들로 되어 있으며, 특히 분수와 폭포가 빼어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복구되었다. 


여름정원

폰탕카(Fontanka), 모이카(Moika),스완 운하(Swan Canal) 사이에 있는 섬에 있으며 '표트르의 궁전' 또는 '페트로 드보레츠'라고 하는 여름궁전 옆에 자리 잡고 있다. 1704년 표트르 1세가 처음으로 착상했으며 1712~1725년 네덜란드식 바로크 양식(Dutch Baroque style)으로 설계되었다.
공원은 윗공원과 아랫공원으로 나뉜다. 물의 낙차를 이용해 분수를 만들기 위해 언덕 위에 공원을 지었다. '예술의 진주'라고 불리는 아랫공원은 아름다운 분수와 가로수길, 소궁전 등이 배치되어 야외 조각전시장 같은 느낌을 준다. 대폭포는 반원형의 수영장으로 흘러내리고 수영장의 중앙에는 삼손 상(라이온 입을 찢는 삼손)과 아랫공원 최대의 분수가 있다. 이 대분수에서 시작하는 운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배들이 도착하는 해변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방공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페트로 드보레츠와 여름정원














































점심







식당 주위의 운하 풍경





에르미타쥐 미술관, 겨울궁전

세계 3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전 세계 예술품을 골고루 소장한 에르미타시는

바로크 스타일의 기품있는 궁전으로, 제정 러시아 황제의 거처였던 겨울 궁전과 네 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은 원래 이처럼 방대하지 않았지만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은 후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 끝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의 딸 Jason이 오늘날의 겨울 궁전을 건설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에 문화의 황금기를 맞는다.

그녀는 밖으로 실내 정원이 나 있는 ‘시계의 방’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그녀는 겨울 궁전을 프랑스어로 '에르미타시’(은둔지, 인적이 없는 방)라고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에르미타시 명칭의 유래이다.

1764~1787년 예카테리나 대제는 궁전 옆에 ‘소(小)에르미타시’와 ‘구(舊)에르미타시’를 건설하고,

겨울 운하를 따라 그것을 연결해 라파엘 회랑을, 그리고 1783~1786년에 에르미타시 극장을 만든다.

1799~1851년 니콜라이 황제가 화랑을 하나 추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新)에르미타시이다.

에르미타시가 출현한 1764년 당시 베를린의 네고니안트라는 갑부가 부채 대신 자기의 미술 소장품 225점을 러시아로 가져왔다.

일찍이 스몰니에 최초의 러시아 여성 학교를 세울 정도로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예카테리나 대제는

서유럽의 고품격 삶의 양식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러시아 귀족들의 생활 문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의

부유한 귀족들과 자본가들은 예술 작품들을 수집하여 개인 화랑에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개인 화랑은커녕 박물관조차 전혀 없었다.

이에 예카테리나 대제는 황제인 자신부터 화랑을 열기로 마음먹고 다양한 소장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그림들을 전시할 곳이 없어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인 쿤스카메라에 임시로 보관했다.

그 후 에르미타시에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카벤첼레 공작(1768), 브를리 남작(1769), 크로자 남작(1772), 월 폴 총리(1779), 보뎅(1781),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1814) 등의 값진 소장품들을 구입했다.

그로 인해 에르미타시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 이미 2,000여 점의 예술작품이 소장된 일류 화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에르미타시는 니콜라이 1세의 무지로 1,000점이 넘는 작품들이 경매에 나오게 되는가 하면,

사회주의 혁명 때는 화랑이 아닌 임시정부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지면서 모스크바 국립표현박물관에 많은 예술품들이 옮겨가는 등의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1922년부터 국립 에르미타시 박물관으로 명명된 이곳은 현재 1,020여 개의 방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루빈슨, 피카소,

고갱, 고흐, 르느와르 등의 명화가 전시되어 있고,

이탈리아 등지에서 들여온 조각품들과 이집트의 미라부터 현대의 병기에 이르는 고고학적 유물, 화폐와 메달, 장신구, 의상 등

300만 점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지붕 위에는 176개의 조각상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것은 서구 미술의 전시품으로 러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터키, 인도, 중국, 비잔틴, 일본 등

세계의 고대 유물과 예술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고대 러시아 문화와 스키타이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또 제정시대의 보석과 왕관 등도 지하 보물실에 전시되어 있다.

겨울 궁전은 1837년 12월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그 후 2년에 걸쳐 재건되었다.

비용을 아끼지 않은 이 공사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대로 복원될 수 있었던 실내는 조르단 층계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바실리 스타소프, 알렉산드르 브리울로프, 오귀스트 몽페랑 등 여러 건축가들에 의해

바로크 복고와 신고전주의, 고딕 복고가 뒤범벅이 되었다.

공공 공간은 넓고 웅장하지만, 비교적 작은 개인 공간들은 부르주아식 편안함의 집약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문양


궁전광장(Palace Square)


길이가 580m 이르는  뒷 건물은 1812년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 승전을 기념하기위해 지은 건물로

현재는 에르미타쥐의 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측의 높은 탑도 승전 기념 조형물로, 47m의 통돌(Monolith)로 된 탑의 꼭대기는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가브리엘 천사를 조각했으며,  

당시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이름을 따서 ' 알렉산드르 원주탑 ' 으로 명명



표트르대제 보좌의 방(Peter the Great's Memorial Throne Room)






표트르관(소보좌관)

' 안나 요안나브나의 왕좌 ' : 1732년 클라우젠에 의해 런던에서 제작된 목조 왕좌로 도금된 대량의 은으로 장식되어있고

                                       등판부분에는 러시아 국가 문장이 은실로 수놓아져 있다. 

                                       뒷 그림은 아미코나의 ' 표트르 1세와 미네르바 '


문장의 방(Armorial Hall)

각 지방 귀족가문의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어 문장의 방이라 하며

천정에는 수 많은 샹들리에와 벽 주변에는 코린트식 황금기둥들이 2층 발코니를 받치고 있다.

겨울궁전에서 두번째 큰방으로 외빈을 위한 리셉션 장으로 쓰였다함.



황실예배당

겨울 궁전 중 가장 장식이 화려한 방으로, 1759년 엘리자베드 여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도실

밖에서 돔 중앙을 통해 햇빛이 들어 오도록 설게되었다.


승전 갤러리


St. George Hall(표트르관-대보좌관)

48개의 기둥과 벽면 장식등이 모두 이탈리아 산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 문장의 방 ' 보다는 좀 작은 방이지만, 러시아 황제의 모든 행사가 이방에서 열렸으며

소보좌관보다 커서 대보좌관(Large Throne Room)이라고도 불리운다.




Pavilion Hall과 Peacock clock

파빌리온 실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벽, 바닥, 천정이 온통 조금의 빈틈이 없이 대리석 조각과 돌 모자이크로 장식된

가장 예쁜 방이라 한다.

공작시계 : 영국의 보석의 명장 ' 제임스 콕스 ' (James Cox)가 1770년대에 제작한 것을 예카테리나 대제가 구입한 것.

유리장 안에는 황금 공작새, 수닭, 부엉이 등이 있어서 한 시간에 한 번씩 울기도 하고 날개도 펴면서 시간을 알려 준다.


섬세한 돌 모자이크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대리석들

공중정원

렘브란트 1669년 ' 돌아온 탕아 '

돌아온 탕아의 바닥이 다 떨어진 신발, 상처난 발바닥, 오른 편에 우뚝 서서 눈을 부릅뜨고 망연자실한 탕자의 형


렘브란트 1634년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 '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을  붙들고 내려 오는 두 사람은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아르마데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 라고.

십자가에서 내려주는 사람 중 하나는 렘브란트 자신의 얼굴이라고...


렘브란트 1636년 ' 다나에 '

다나에(그리스어: Δανάη)는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우스와 에우리디케(오르페우스의 연인 에우리디케와 동명이인)의 딸이며 페르세우스의 어머니이다. 

공주는 있으나 왕자가 없어 걱정을 하던 아크리시우스예언자를 찾아갔다가 자신이 땅 끝에서 자신의 외손자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들었다. 겁이 난 아크리시우스는 아직 처녀인 딸이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청동 탑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나, 우연히 다나에를 발견한 제우스가 금빛 로 모습을 바꾸어 방으로 스며든 뒤 다나에를 임신시켰다. 다나에는 곧 영웅 페르세우스를 낳았다.

제우스의 분노를 두려워한 아크리시우스는 딸 다나에와 외손자 페르세우스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상자에 넣어 바다로 던져 버린다. 제우스의 부탁을 받은 포세이돈은 상자가 바다에 가라앉거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했다. 상자는 세리포스의 바닷가에 닿았고, 폴리덱터스 왕의 동생이자 어부딕티스가 상자를 발견했다. 딕티스는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를 극진히 대접했고, 특히 페르세우스를 자기 아들처럼 잘 길렀다. 그러나 딕티스의 형인 폴리덱터스 왕은 아름다운 다나에와 결혼하기 위해 페르세우스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는 위험한 임무를 주어 떠나 보낸뒤 죽이려 획책했다.

폴리덱터스의 기대와는 달리 페르세우스는 헤르메스신과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아 메두사를 죽이고 안드로메다를 구출한다. 신탁을 들은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로 가는 대신 라리사로 향했다. 그 곳에서 열리는 던지기 대회에 참가한 페르세우스가 던진 창은 우연히 그 자리에 와 있던 외할아버지 아크리시우스를 꿰뚫는다. 이렇게 하여 예언자의 신탁은 실현되었다.

세리포스로 돌아온 페르세우스는 억지로 다나에와 결혼하려는 폴리덱터스를 죽이고 인정 많은 양부 딕티스를 왕위에 올렸다.

다나에는 렘브란트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루벤스 1612년 ' 로마인의 자비 '

감옥에소 굶주려 죽어 가고 있는 아버지에게 따리 젖을 먹이고 있는 그림인데, 이 부녀를 발견한 로마의 간수들은 이 장면을 보고 감동해서

그들을 풀어 주었다는 로마시대 미담을 소재로 했다 함.


루벤스 " 술의 신, 바쿠스 '


루벤스 1618년 ' 땅과 물의  연합 '



살아있는 물고기, 뱀, 개구리등에 석고를 부어 실감나게 만들었다는 접시.


위협하는 에로스 [L'Amour menaçant]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 1757년

좌측에서 보면 개구쟁이 소년의 모습이 연성되고, 우측에서 보면 뭔가 비밀스러운 듯한 모습이다.



알레고리 '겨울'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 1771년


성 이삭 성당

러시아어: Исаакиевский собор)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하며 현재로는 세계에서 3번째 큰 성당이다.

높이 101.52m, 성당의 둥근 천장이 21.83m, 길이가 11.2m, 폭이 97.6m인 이 성당은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로 둘러싸고 있다. 1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표트르 대제 치세에 바실리옙스키 섬에 최초의 성 이사악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 뒤 1717년에 원로원 광장(현재 데카브리스트 광장)으로 이전했지만 연약한 지반 탓에 낙뢰로 소실되었다.  

예카테리나 대제의 칙명에 따라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안토니오 리날디의 감독 아래 재건 사업에 들어갔지만,

미완성으로 끝나고 파벨 1세가 그녀의 유지를 이어받아 다시 재건을 실시하였다.  


오늘날의 성 이사악 성당은 알렉산드르 1세 치세에 건립된 것으로 프랑스 출신 궁정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의 설계에 따른 것이다.

몽페랑의 감독 아래 1818년부터 1858년까지 무려 40년에 걸쳐 지어졌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소련 정권 아래에서 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른 건물들처럼 소실될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성 이사악 성당의 황금 돔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독일군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성당의 돔을 회색으로 덧칠하였다.  

소련 정권이 붕괴된 후에는 종교용 건물로서의 이용이 재개하고 있다.  





표트르대제의 청동 기마상

표트르의 손자며느리 예카테리나 2세(1729~1796)가  위대한 개혁군주를 기려 1782년에 세었으며

받침돌에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1세에게'라는 헌사를 붙였다.


청동 기사에서 조각상 자체보다 유명한 것이 '천둥돌'이라고 부르는 받침돌 좌대로

인간이 인류사에서 기계나 짐승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옮긴 한 덩어리 돌 중에 제일 커서

1500톤 화강암 자연석을 9개월 동안 운반해 오는 사이 1250톤으로 쪼아냈다고. 천둥돌 높이만 7m에 이르러 청동상 6m보다 높다.


기마상 조각은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를 불러와 맡긴 지 3년 만에 완성했고

표트르를 태운 말이 뒷발로 뱀을 밟은 채 두 발을 들고 울부짖는 모습이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다.


청동 기사가 서 있는 곳은 세나트(Senate) 광장으로 원로원이라는 뜻.

1825년 12월 귀족층 개혁파 청년 장교들이 실패한 쿠데타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일으켰던 곳이어서

소련 시절 '데카브리스트(12월) 광장'이 됐다가 2008년 원래 이름을 되찾았으며

뒤에 보이는 건물은 옛 원로원이 있던 곳에 2009년 옐친 대통령 이름을 붙여 세운 국립 '보리스 옐친 대통령 도서관'으로

장서보다 디지털 책과 자료에 집중하는 전자도서관이하며 사진 오른쪽 강 쪽으로는 나란히 헌법재판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