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마일로보 호텔 조식 후 노보데비치 수도원 관광, 모스크바 국립대학, 참새언덕, 중식으로 샤슬릭을 먹고
크레믈린 궁전, 성 바실리 성당, 붉은 광장 관광, 석식 후 러시아 민속공연 관람
호텔 좌측에 있는 ?
노보데비치 수도원
모스크바 남서쪽에 있는 노보데비치 수도원(Ensemble of the Novodevichy Convent)은
16, 17세기에 이른바 ‘모스크바 바로크 양식(Moscow Baroque style)’으로 건축되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모스크바의 방어 체계에 통합된 수도원 중에 하나로 러시아 정치사·문화사·종교사와 직접적이고 깊은 연관이 있다.
차르 일가와 귀족 여성들이 이 수도원을 이용하였고, 사망한 후에는 이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러시아 건축의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는 수도원은 아름답게 장식된 내부시설 안에 중요한 회화와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거리화가에게서 그림 한점 구입
모스크바 국립대학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는 학자인 미하일 로모노소프에 의해 1755년 모스크바 중심가에 세워졌다.
1940년대 말, 스탈린은 러시아의 새 대학교 건물을 짓기로 결심하고 레프 루드네프(1885~1956년)에게 설계를 맡겼다.
스탈린의 집권이 강화되면서 모스크바의 구성주의 건축은 막을 내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축 양식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시가지의 상당 부분을 소위 '스탈린 고딕' 양식으로 재건하고 싶어했다.
스탈린의 '7자매'라고 불리는 일곱 개의 마천루가 시내 중심지에 세워져, 모스크바 어디에 있더라도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오게끔 했다.
'웨딩 케이크'라는 별명으로 인해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사실은 전혀 매력적인 구석이라고는 없는, 위협적인 건물들이다.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는 '7자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이다. 높이가 240미터로, 사실 1988년까지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크렘린의 탑과 유럽의 고딕 대성당에서 영향을 받았다.
독일군 전쟁 포로들의 노동력으로 지어졌으며, 33킬로미터의 복도와 5천 개의 강의실이 있다.
중앙 타워의 꼭대기에 있는 별은 무게가 12톤에 달하며, 파사드는 밀단과 소비에트 문장, 그리고 시계로,
그 아래의 테라스는 자신있게 미래를 바라보는 학생들로 장식하였다.
참새언덕
모스크바 시가지와 모스크바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러시아혁명 뒤 '레닌언덕'으로 불렸으나 '참새언덕'이란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톨스토이의 ' 전쟁과 평화 '에는 나폴레옹이 이 언덕에 올라 모스크바 시내를 내려다보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이지만 높이는 해발고도 220m 정도밖에 안 된다.
모스크바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적합하여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크레믈린 궁전 가는 길
크레믈린 궁
' 크렘린 ' 은 성체 또는 성벽을 의미하는 러시아 어 ' 크레믈 '의 영어식 표기이다.
13세기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를 건설할 때까지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은 러시아 역사의 주요한 사건들과 직접적이고 분명한 연관이 있는 장소였다.
크렘린 궁전 성벽 안에는 다수의 독특한 건축물과 조형 예술의 걸작이 있다.
이를테면 수태고지 교회(Church of the Annunciation), 성모 승천 대성당(Cathedral of the Dormition), 천사장 교회(Church of the Archangel), 이반 벨리키(Ivan Veliki) 대제의 종탑같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종교 기념물이 있다.
크렘린 대궁전과 성벽 안에는 성모 마리아 탄생 교회(Church of the Nativity of the Virgin, 1393)와 테렘 궁전(Teremnoi Palace) 같은 기념물이 있다.
붉은 광장에 있는 상트 바실리 대성당은 러시아정교회 예술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 기념물이다.
러시아 건축물은 크렘린 궁전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은 1156년에 건설되었고, 다른 기념물들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었다.
1263년에 모스크바 공국이 설립되고 1328년에 블라디미르(Vladimir) 공국이 모스크바로 이전한 이래로 이곳은 정치, 종교 권력의 중심지였다. 원래 건물 몇 채는 대성당 광장 경계에 있었으나, 성모 마리아 탄생 교회 같은 다른 건물은 재건할 때 대궁전 안으로 편입되었다.
총대주교 사원, 17세기에 세운 12사도 교회(Church of the Twelve Apostles) 그리고 특히 성곽 북서 모퉁이에 있는 표트르 대제의 무기고를
재건하면서 궁전은 북쪽으로 확장되었다.
카자코프(Matvey Fyodorovich Kazakov)는 예카테리나 2세(Catherine II)를 위해 상원의 삼각 궁전(The triangular palace of the Senate, 구소련(舊蘇聯)의 각료회의실)을 건축하였다.
상원의 삼각 궁전은 예수 승천 수도원(Monasteries of the Miracle and of the Ascension)과 무기고 사이 북동쪽에 들어섰다.
그러나 예수 승천 수도원과 무기고는 1932년에 철거되었다.
카자코프는 남동쪽에 예카테리나 여제를 위해 소규모의 니콜라이(Nicholas) 궁전을 지었으나, 역시 1932년에 파괴되었다.
크렘린 궁전 동쪽 성벽 아래 있는 붉은 광장은 크렘린 궁전과 연결되어 있다.
광장 남쪽에 있는 상트 바실리 대성당은 러시아정교회 예술의 가장 아름다운 기념물로 유명하다.
상트 바실리 대성당은 원래 카잔(Kazan) 성당과 짝을 이루는 교회였다.
카잔 성당은 포자르스키(Pozarsky) 대공이 폴란드를 상대로 거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1633년에 ‘고움(Goum)’과 인접한 넓은 지역에 건축하였다.
그러나 카잔 성당은 1930년대 초반에 주변에 있던 수녀원 몇 채와 함께 사라졌다.
크렘린 궁전은 삼각형 모양의 성곽에 둘러싸여 있으며, 성벽에 5개의 문과 29개의 탑을 증축하였다.
쿠타피야타워
크렘린에는 모두 스무 개에 이르는 탑과 망루가 있는데 열아홉 개가 성벽 위에 솟아 있고 쿠타피야 타워만 성 밖으로 나와 있다.
높이도 제일 낮아 13.5m밖에 안 되는 데다가 생긴 것도 타워라기보다 건물에 가깝고 그나마 천장도 지붕도 없이 사방으로 벽체만 서 있다.
밀라노에서 온 건축가 알로시오 디 카르카노가 1516년 해자 바깥에 지은 전방 방어용 망루 겸 포대였기 때문.
이곳과 크렘린 출입구 트로츠카야 타워 사이엔 들어올리는 다리 도개교가 놓여 있어 공격자에게는 난공불락의 장애물이었다고.
건물이 크고 둔하게 생겼다고 해서 '못생기고 남루한 여자'를 뜻하는 쿠타피야라는 이름을 얻었고,
지금은 관광객들이 크렘린으로 들어가는 입구 구실을 하고 있다.
트로이츠카야 타워
크렘린 서쪽 성벽 중앙에 선 트로이츠카야 타워는 스무 개 성벽 탑 가운데 가장 높아 80m에 이르고
밀라노 건축가 알로이시오가 방금 지나온 쿠타피야 타워보다 앞서 1499년에 완공했다.
아래 석조 건물은 6천석짜리 국가크렘린궁인데 일반에게는 크렘린 대회의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크렘린 건물 중에서 제일 최근인 1961년 흐루쇼프 서기장 시절에 지어 소련 공산당대회와 중앙위 총회 장소로 썼고
소련 해체 후엔 국제 회의장이나 볼쇼이극장 부속 극장으로 사용한다.
500여년 전 이반3세(대제)가 비잔틴에서 도입해 온 러시아의 상징 쌍독수리가 들어 있는데,
러시아혁명 후 낫과 망치가 든 소비에트 문장에 밀려 사라졌다가 소련방 해체 후 정부 청사에 다시 등장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노획한 청동 대포들
스파스카야타워
1491년 이탈리아 건축가 피에트로 솔라리가 세웠는데,크렘린 타워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71m이며 '구세주'라는 뜻이다.
타워 아래로 난 동쪽 성벽 문은 크렘린의 주 출입구였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어야 했다고 한다.
소비에트 시절엔 당 서기장을 비롯한 최고 정치 지도자들만 드나들었다하며
꼭대기엔 원래 제정 러시아의 상징 쌍두 독수리상이 올라앉아 있었지만
1935년 소련 정부가 끌어내리고 트로이츠카야타워처럼 왕별 '루비 스타'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