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2018.08.13 요새, 로스트랄등대, 구 해군성, 피의 사원, 카잔성당, 운하유람선

갯바우2 2018. 8. 24. 14:07


아침 6시에 기상하여 6시15분부터 1시간 동안 호텔 주위로 조깅 - 호텔 부페 조식 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로스트랄 등대 관광

- 피의 사원 관람 후 점심식사 - 카잔 성당 - 넵스키대로 - 운하 유람선 - 저녁 식사 후 열차(삽산)으로 모스크바로 이동 - 이즈마일 로보 호텔

투숙


첫날 현지 가이드에게 치안 상태를 물어보니 한마디로 혼자 다니면 안되요!라고 하였지만

하루 있어 보니 별 문제가 없을 듯 보여 6시에 기상하여 6시15분터 1시간 동안 호텔 근처 공원에서 조깅


유럽권에서 익숙해진 트렘





로스트랄 등대 가는 도중에





네바강 스핑크스

3500년 전 이집트 룩소르의 아멘호텝 3세의 무덤을 지키던 것을사들이려고 프랑스와 경쟁하다가

프랑스에 넘어간 것을 프랑스혁명 와중에 다시 러시아가 사왔다.

아카데미 안마당에 뒀다가모스크바 레닌그라드역을 설계한 궁정 건축가 콘스탄틴 톤이 1834년 선착장을 지으면서 옮겨 세웠다.

한 개 무게가 23톤이나 된다.







로스트랄 등대
로스트랄이란 라틴어로 뱃머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해전에서 승리를 기념하여 원주를 세우고 포획한 배의 뱃머리로 기둥을 장식하였던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 되었는데 러시아도 이를 모방하여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등대다.

러시아가 바이킹 왕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과거의 스웨덴과의 해전시 침몰시킨 스웨덴 뱃머리를 잘라다가 등대에 붙여놓은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국가적 자부심의 표증이자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바이킹 해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을 기념하는 등대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차르 표트르 대제는 1703년 스웨덴에게 정복당했던 땅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를 세워 이 도시를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다.

그 당시 러시아는 스웨덴과 대()북방 전쟁(1700~1721)을 치르던 중이었으므로,

이 도시에 세워진 최초의 건축물은 도시의 섬 중 하나에 세워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였다.

이 요새 시설은 나중에는 감옥과 대성당 하나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었으며,

러시아를 근대 국가로 만들려는 표트르 대제의 결심을 보여 주는 기념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사실상 표트르 대제의 의지에 의해 창조되었다. 도시가 건설되는 동안,

그는 이따금 1703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북쪽에 단 3일 만에 지은 간소한 통나무집에 머무르곤 했다.

스웨덴 군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한 번도 닿지 못했으므로, 사실 전쟁 중에 요새가 필요했던 일은 없었다.

요새 내 도시의 일부로 1712년에서 1733년에 걸쳐 웅장한 석조 성당이 건축되었으며,

표트르 대제부터 처형당한 니콜라이 2세까지 러시아의 모든 차르들이 안장된 최후의 휴식처가 되었다.
1720년경 이후로 요새는 군사 주둔지이자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동안,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분노한 대중들로부터 황제 측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결국에는 볼셰비키 파의 손에 점령당했다. 1924년 요새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는 표트르 대제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의 시절까지 근대 러시아의 역사를 가로지른다.

이 요새는 웅장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최초로 건설된 커다란 규모의 건물이었으며,

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 러시아의 차르들이 누렸던 절대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이 요새는 1990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지구의 일부이다





건너편의 에르미타쥐 미술관



피의 사원 가는 길...


 

피의 사원(그리스도 부활성당, 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피의 구원 사원 또는 피흘리신 구세주 교회 (러시아어: Храм Спаса на Крови, 영어: 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그리스도의 부활, 구세주의 부활을 의미하는 피가 있는 교회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동방정교회 기념관이며, 1881년3월 부상당해 죽은 황제인 알렉산더 2세의 피가 묻어있는 장소이다.

당시 알렉산더 2세는 이 곳의 창고에서 피를 쏟았다.

상트 페테르 부르크의 역사적 중심부인 미하일로프스키 정원과 Konyushennaya 지역의 그리보예도프 은행 근처에 위치한다.

사원의 길이는 81m 이며, 최대 수용인원은 1600명으로 러시아 건축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며 박물관이다.

이 사원은 알렉산더 3세의 명령에 의해 1883년에서 1907년까지 건축가 알프레드 팔란다와 이그나탸의 공동 프로젝트로 건립되었다.

“러시아 스타일”을 초안으로 만든 이 사원은 모스크바의 성 바실 성당과 다소 비슷하게 구현되었다.


알렉산더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해 2000만명을 해방시켜 '해방자 짜르(황제)'라고 불렀던 개혁 군주로

​지방자치제와 배심원 사법제도까지 진보적 제도를 정착시켰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 정치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 유럽 유학을 다녀온 청년 장교들의 군사 혁명이 실패한 이래

러시아엔 꾸준히 자유를 갈망하는 사회 개혁 움직임이 일었고, 1870년대엔 인민해방 운동과 직업적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운동가 그룹 중에 '인민의 의지'라는 급진 혁명운동 조직이

1881년 아침 알렉산드르 2세가 마차를 타고 산책 나왔다가, 입헌군주제 도입 방안에 서명하러 궁으로 돌아가던 길목에서 짜르(황제)를 습격한다.

조직원 두 명은 이곳 그리보예도프 운하 곁을 지나던 알렉산드르2세의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황제는 다치지 않았고 마차에서 내려 범인을 꾸짖는다.

그 사이 다른 한 명이 폭탄을 터뜨려 자신은 죽고 황제에게 중상을 입은 채,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옮겨졌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둔다.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추모해 아버지가 피 흘린 피습 장소에 세운 것이 그리스도부활성당이자 '피 위에 선 교회'이다.







알렉산더 2세가 피를 흘렸던 바로 그 자리 - 흰 자갈이 깔린 곳















기념품 가게에서 산 피의 사원 모형


점심





카잔 성당과 카잔의 성모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대로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대성당으로

로마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본뜬 네오클래식 양식의 건물이다.

스트로하노프 백작의 농노 출신 건축가 바로니킨(A. Varonikhin)에 의해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어졌다.

네프스키 대로(Nevsky Prospekt) 쪽으로 넓혀진 반원형의 회랑에는 9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서 있다.

건물 내부에는 19세기 초의 거장들이 그린 이콘(icon)이 있고, 특히 《카잔의 마리아 상(Our lady of Kazan)》이 유명하다.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성당 안에는 프랑스군에게서 빼앗은 107개의 군기와 승리의 트로피 등이 걸려

있다.



카잔의 성모

이 이콘은 ‘길의 인도자이신 성모’ 이콘의 또 다른 하나의 변형으로, 성모님의 머리는 아기 예수님 방향으로 숙여져 있다.

예수님은 오른손으로 축복을 주고 계시는데, 왼손은 겉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성모님의 양손 또한 묘사되지 않는다.

카잔의 성모 이콘은 13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돼 러시아로 건너온 것으로

모스크바 북동쪽으로 500마일 떨어진 볼가 강 유역의 카잔이라는 도시에 보관되고 있었으나, 1438년 타타르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이 이콘은

사라져 한 세기 이상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고대 러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1579년 이 카잔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던 마트로나라는 8살 난 소녀에게

성모님께서 여러 차례 나타나셔서 한 장소를 알려주며, 성화상이 묻혀 있을 것이니 교회에 알리라고 하셨다.

이에 그 소녀가 교회에 알렸으나 아무도 이 소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않자

마침내 그 소녀는 어머니와 함께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그 장소를 파내어 천으로 감싸여진 대단히 오래된 성화를 발견했다.


이 소식을 듣고서야 교회 당국도 나서게 되어 장엄한 행렬을 지어 카잔의 대성당으로 성화를 옮겨 모셨다고 한다.


이후 1612년 폴란드가 침입했을 때 이 성모 이콘을 앞에 들고 나아가 크게 승리할 수 있었고,

1709년 스웨덴이 침입했을 때, 그리고 1812년 나폴레옹의 군대들이 모스크바를 점령 했을 때도

카잔의 성모님께 보호해 주심을 청하면서 이 이콘을 앞세우고 전투에 나아가 승리했다.

그로 인해 이 카잔의 성모 성화는 러시아의 수호자로 크나큰 공경을 받고 있다

특히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물론 러시아 각 도시에 이 카잔의 성모께 봉헌한 성당들을 건립하고,

이 성화의 사본들을 모셔 자신들의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 보였다.

1917년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많은 성당들이 폐쇄되고 파괴되면서 이 카잔의 성모 성화의 원화도 갑자기 사라졌다.

많은 이들은 이 성화 또한 파괴돼 없어진 것으로 생각했으나, 1953년 백만장자 미셀 헤지스가 아서 힐만에게서 이 이콘을 구입하면서

 다시금 세상에 등장했다.


1963년 파티마의 푸른군대는 “러시아는 회개할 것이고… 나의 티 없는 성심은 승리할 것이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의 실현을 확신하며 포르투갈에 있는 파티마 국제센터에 비잔틴식 성당을 건립하고,

1970년에 이 이콘을 미셀 헤지스의 딸 안나 미첼 헤지스에게서 사들여 그 안에 모셨다.

1993년 이 성화는 교황청으로 보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증정했다.

그런데 교황은 이 성화가 러시아 정교회의 종교적 유산이기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에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2004년 8월 28일 발터 카스퍼 추기경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모스크바에 보내,

카잔의 성모 이콘을 러시아 정교회의 알렉세이 2세 총대주교에게 전달했다.


'이콘을 거는 곳'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이코노스타시스라고 하며

성화벽 안에는 제단과 사제들이 머무는 공간 지성소가 있고 가운데에 난 문으로 사제가 드나들며 미사를 집전한다..

​문 양쪽으로는 대개 예수, 성모, 성모자상, 세례 요한 중에 두 성화를 붙이는데 카잔성당은 왼쪽에 성모, 오른쪽에 그리스도를 모셨다.

성화벽 문 위에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삼각형에서 신의 섭리(Providence)를 상징하는 빛이 뿜어 나온다.

앞서 성당 외부 박공에 붙은 것과 같은 형상이며 신(God)을 뜻하는 보그(Бог)의 약어 ​Бгъ가 새겨져 있다.






넵스키대로

넵스키대로(러시아어: 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는 ‘네바강의 거리’라는 뜻으로, 네바강 어귀 왼쪽 기슭에 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길들은 넵스키 대로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옛 해군부앞에서 동쪽으로 뻗어, 카잔성당() ·백화점 ·호텔 ·극장등을 거쳐, 다시 폰탄카강()을 건너

18세기에 건립된 알렉산드르넵스키 수도원까지 길이 4.5㎞, 최대너비 60m로 뻗어 있는 거리로 호텔,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 음악당 등이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습한 늪지대였던 이곳은 1710년에 처음으로 길이 뚫리게 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문화, 상업의 중심지이자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거리에는 19세기에 건축된 화려하면서도 아담한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산 마트료시카가 그려진 냄비받침



네바강 유람선










표트르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당시, 잠시 들러 쉬었다는 오두막?

순양함 오로라




페트로파블로스크 요새



에르미타쥐 미술관





쇼핑 센타에서 산 마트료시카와 알 공예품


마트료시카

대표적인 러시아의 민예품이다. 다산의 상징이라고...

인형의 몸체는 상하로 분리되고, 인형 안에 크기가 더 작은 인형이 3~5개 반복되어 들어 있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로 만들어지기 위해 인형의 팔다리는 없으며, 5중 이상으로 인형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전체적인 형태는 보통 모난 부분 없이 머리부터 둥근 원통형이다.
마트료시카라는 명칭은 러시아 여성 이름인 마트료나(matryona)에서 유래했다.

본래는 여성의 모습으로 인형을 만들었으나 유명인이나 동물 등 여러 가지 캐릭터로 된 마트료시카 또한 많다.

안의 인형이 점차 작아질수록 섬세하게 그리는 기술이 필요하여 인형의 예술성은 정교한 손재주로 평가된다.
 최초의 마트로시카 인형은 1890년 러시아 아브람체보(Abramtsevo)의 공예가인 세르게이 말루친(Sergey Malyutin)이 디자인한 것을

바즐리 지뵤즈도흐킨(Vasily Zvyozdochkin)이 조각하였다고 알려져있다.

말루친은 일본의 목각 인형인 고케시 인형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말루친의 후원자였던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의 아내가 마트료시카를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하고

동메달을 수상함을 계기로, 러시아 각지에서 다양한 마트료시카 인형을 만들게 되었다.
전통적인 제작방식으로는 가장 큰 바깥쪽의 인형은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의 형상으로 만들고, 안의 인형은 성별이 달라지게 하며,

가장 작은 인형으로는 아기가 나오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인형의 개수를 홀수로도 만드는 지금과 달리 인형의 총 개수가 짝수가 되도록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1900년대에 들어서는 러시아 지도자들을 그린 마트료시카가 무척 인기가 높았다.

현재의 마트료시카 제작 공예가들은 다양한 주제로 인형을 만들고 있다.



저녁 - 한식당


저녁 식사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으로 이동하여 고속열차 삽산(우리의 KTX에 해당)으로 4시간에 걸쳐 모스크바로 이동

올림픽 게임 때 선수단 숙소로 사용되었다는 객실이 만개가 넘는다는 이즈마일로보 델타 호텔에 투숙





이즈마일로보 델타 호텔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