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9.08.10 크로아티아로 출발

갯바우2 2019. 8. 24. 09:13

prologue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운 단순 지식으로는

나라명이 유고슬라비아, 수도가 베오그라드, 통치자가 티토였으며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현, 체코), 폴란드등과 같이 사회주의 국가로

구 소련의 지배를 받고있는 유럽의 변방으로 알고만 있었고,

최근의 지식으로는, 크로아티아란 국명은 유고 내전 후 유고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그냥 축구를 우리나라와 FIFA 랭킹이 비슷한, 혹은 조금 더 높은 나라인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몇년 전부터 방송의 영향인지 관광지로 주목받기 시작하고,

방송에서도 보니 자연환경이 아주 수려해보이고, 마침 대한항공 직항노선도 2018년도 부터 생겼다하여

2019년 여름휴가는 발칸3국(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으로 정하고,

연초에 마일리지로 왕복으로 프레스티지석을 예약하려 했으나

가는 편은 만석으로 이코노미로, 오는 편만 프레스티지로 예약하고, 하나투어 현지 합류로 예약.


유고, 크로아티아의 역사


크로아티아 지역의 토착민은 일리리아(Illyrian)족으로

기원전 3세기에 해안지방에서는 로마와, 내륙지방에서는 겔트족과 교류하던

일리리아족은 로마제국에 영토를 잃었다.

3세기경, 스플리트 지역의 양치기소년이었다가 후에 로마의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황제는

황제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스플리트에서 노년을 보내고자

스플리트에 궁전을 겸한 요새를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동부 유럽 최고의 로마 유적지가 되었다.

4세기 초에 고트족, 5세기 전반에 훈족의 침입을 받았다

크로아티아는 서로마제국이 5세기경에 멸망할 때까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크로아티아는 옛 로마제국의 일부로 7세기경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슬라브계가 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그 유래이다.

9세기에 들어와 슬라브라는 이름과 함께 크로아티아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7~9세기에 북부는 프랑크왕국, 동부는 동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925년 크로아티아의 트미슬라브공()이 왕위에 오르면서 비로소 크로아티아 왕국의 통일이 이루어졌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1102년 동로마 제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헝가리왕을 통치자로 하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가가 성립되었으며,

1202년에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가 크로아티아의 해안산지인 달마티아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이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남()헝가리의 모하치전투에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연합군이 투르크군에게 패하면서

1699년까지 크로아티아 대부분의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러시아-투르크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자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도 1세가 크로아티아의 왕위를 차지하였다.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헝가리의 통치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186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918년 1차세계대전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에서 벗어나,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왕국(일명 베오그라드 왕국, 1929년 이후는 유고슬라비아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1944년 요시프 티토(Josip Broz Tito)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였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수립된,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약칭, 유고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동유럽의 자유화 물결과 구소련의 해체로 인하여 1990년 4월 크로아티아 공화국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공산당이 퇴진하고

비공산 민족주의 정권이 탄생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으로부터 이탈을 시도하려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연방 최대인 세르비아 공화국과 민족적으로 강하게 대립하였고,

특히 경제적으로 농업 중심의 남부 각 공화국에 대한 경제부담이 커 불만이 쌓여왔다.

1991년 5월 주민투표에서 ‘주권국가에 의한 국가연합’에 대한 찬성이 94%에 달해 1991년 6월 독립선언을 하였다. 

결국 크로아티아는 연방 유지를 지향하는 세르비아 공화국과의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맞서 연방 이탈에 반대하는 세르비아와 전쟁상태에 돌입하였고,

국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따로 ‘크라이너’라는 공화국을 수립하여 크로아티아측과 맞섰다.

같은 해 6월에는 연방군대가 크로아티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여 내전에 돌입하였고 9월에는 연방군이 크로아티아에 대공세를 가하였다.

12월에 세르비아인의 크라이너 자치구가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역시 12월에 독일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한 것을 시작으로 1992년 1월 EU도 이들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UN은 3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 지구인 동 ·서슬라보니아와 크라이너 세 지구에

30개국 1만 4000명의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여 정전 감시활동을 전개하였다.

크로아티아는 5월에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함께 UN에 가입하였다.

1993년 1월에는 크로아티아군이 정전을 파기하고 크라이너를 침공하여 발발한 내전으로 1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1994년 1월 신유고연방측과 관계정상화 협정에 조인하고, 같은 해 3월 크라이너 지역 세르비아계와 휴전 협정에 서명하여 오늘에 이른다.

민족,언어,종교에서 큰 차이가 없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유고연방에 그대로 남아, 신유고 연방인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결성해

구유고 연방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6년에 각각 독립하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구유고 연방은 오늘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세르비아등

여섯 나라로 나누어져 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아 카톨릭 문화권에 속하며

세르비아는 그리스 정교회 문화권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섞여있고

알바니아는 이슬람 문화권에 속한다.


크로아티아로 출발

8월10일 새벽4시에 일어나 짐을 챙겨, 카카오 택시(27,100원)를 불러 김해공항으로

김해공항에서 7:00 인천공항으로 출발

인천공항 마티나 라운지에서 간단히 아침식사 해결하고


인천공항에서11시05분에 자그레브로 출발하여

                   자그레브 시간 15시45분에 도착             





여행지도


여행일정 : 자그레브 대성당 - 자그레브 구시가지 - 돌의 문 - 성 마르크 교회 - 카타리나 교회 - 반 옐라치치 광장

               - 한인식당에서 육계장으로 저녁식사 후 - DOUBLETREE BY HILTON ZAGREB에 투숙


자그레브

도시의 구시가지는1세기 로마인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자그레브’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1094년에 로마 가톨릭 주교구가되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241-42년 몽골 침략 이후 자그레브는 왕의 보호를 받는 요새 도시로서 성장하기 시작한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 중부유럽은 오랫동안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는데,

19세기 이후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편입되면서,

자그레브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된다.

1991년에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선언 후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발생한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에서 자그레브는 전쟁의 중심지였고,

유고슬라비아 공군으로부터 로켓포로 인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독립 이후에는 중부 유럽의 중심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중부유럽과 지중해, 그리고 발칸반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크로아티아뿐만 아니라

중부유럽을 기반으로 하는 대기업들의 본사가 이 도시에 자리하고 있으며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가장 중요한 산업은 기계설비, 화악, 약학, 직물, 식품산업 등이다.





자그레브 대성당 앞 광장에 우뚝 서있는 성모마리아상. 반짝이는 황금빛이 푸른 하늘과 대조돼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자그레브 대성당(Katedrala Marijina Uznesenja, Zagreb Cathedral)

1093년에 헝가리 왕인 라디슬라스(Ladislas)가 건설을 시작하여 1102년에 완공했고 1217년에 성모마리아에게 헌정되었다.

성당은 높이가 77m, 넓이가 46.2m이며 두 개의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데 북쪽 탑이 105m, 남쪽 탑이 104m이다.

성당 내부의 면적은 1,671㎡로 최대 5,0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큰 규모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바로크 양식의 제단, 신고딕 양식의 제단 등이 있고 성당에만 보물급 유물이 10개 이상이 되어 '

크로아티아의 보물'이라 부른다.

외관은 로마네스크의 과도기적인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1242년 타타르족의 침공으로 심하게 훼손되었다. 

1264년부터 20년에 걸쳐 고딕 양식으로 복구했고,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초까지 성당 주위에 성벽을 쌓아 또 다른 침입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17세기에 발생한 2번의 커다란 화재로 인해 성당은 손상을 입게 되었고 이후 17세기 중반까지 복구했으며

육중한 종탑을 남쪽에 세워 감시대로도 활용했다.

 











돌라츠(Dolac)시장자리

새벽부터 오후3시까지 여는 장으로 시간이 늦어 파장하여 보지는 못함



구시가지




KRAVATA

17세기 경 독일에서 있었던 종교전쟁 '30년 전쟁'에 크로아티아는 프랑스의 우방으로 용병을 보내게 되었다.

그들이 프랑스에 도착했을떄 그들 모두가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무사귀환의 염원을 담아 병사들의 아내 혹은 연인들이

감아준 일종의 부적이었다.

스카프에 관심을 보인 루이14세가 '저것이 무엇이냐고'고 묻자

시종장이 뜻을 모른체 '크라바트(크로아티아의 병사라는 의미) 입니다' 라고 대답했는데

이로부터 남자들의 목애 맨 스카프가 '크라바트'가 되었다고

루이14세의 명으로 프랑스에서 오늘날의 넥타이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현재도 프랑스에서는 넥타이를 크라바트(Cravate)라고 부른다.


성 조지(St. Georgius) 동상

기독교 초기 순교한 14성인 중의 한 성인으로

용이 마을에 나타나 자꾸 처녀들을 헤쳐, 이들과 싸워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다.

말아래에 있는 것이 용


돌의문(Stone Gate)

자그레브의 시내에있는 문

13세기에 건축되어서 벌써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으로 올드 그라데츠(Gradec) 지역을 감싼 4개의 문 중 북쪽을 지키는 문이다.

성모마리아 그림이 문에 세겨져있으며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축물은 1760년에 다시 건축한 것이다.
1731년의 대화재로 모든 것이 불타버렸는데, 원래 성문에는 많은 나무 장식이 되어 있었으나 성모마리아 그림만이 전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로 인해 기적적인 힘을 지닌 그림으로 추앙받기 시작했고 성지순례지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마리아 그림이 발견된 곳은 이곳 재 한가운데였으며 액자만 탔을 뿐 그림은 전혀 타지 않았다.

이후 스톤게이트의 깊이 들어간 부분에 바로크 양식의 제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성모마리아 그림을 모셔놓았다.

1778년에는 정교한 바로크 양식의 철문을 만들어 제단 주위를 감쌌다. 그림에 있는 금으로 된 왕관은 1931년에 새로 덧붙여 그려넣은 것이다.





성 마르크 교회(Saint Mark's Church)

자그레브의 대표 건물인 13세기에 건축되었으며, 빨강, 파랑, 흰색의 아름다운 체크무늬 바탕의 지붕이 유명하다.

지붕의 왼쪽에는 크로아티아 문장이 장식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자그레브시 문장이 모자이크로 꾸며져 있다.

성당의 내부에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며, 크로아티아 출신의 조각가인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화려한 고딕 후기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며, 수많은 관광객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테슬라의 부조

니콜라 테슬라(Nicola Tesla)가 크로아티아 출신



실연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

이름 그대로 가족,부부, 연인등의 관계가 단절되어. 이별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보내준 물건들로 구성되어있다

전시된 작품은 사연이 담긴 병, 방 문짝, 핸드폰, 옷, 몸의 상처 딱지 등... 그 물건들 자체는 일상적이나 그것들 뒤에 숨어있는


하나 하나의 사연이 인상적.


카타리나 교회(Catherine Church)

성 마르크 교회를 보고 옐라치치광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교회.

자그레브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건축이고,내부에 거장들의 회화 작품이 있다.

성당 전면에는 성모상과 4명의 조각상이 있는데

마태오, 마르코, 누가, 요한이라고.



반 옐라치치 광장(Trg bana Jelačića , Ban Jelacic Square)

17세기에 건설된 오스트로-헝가리 스타일의 광장으로 시내 중심부에 있다.

이 광장의 이름은 분수의 이름을 딴 만두세바크 Mandusevac로 시작하여 과거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광장 주변에는 클래식 양식과 모던 양식 등 서로 다른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조화롭게 들어서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은 1827년에 지어진 건물이며, 아름다운 파스텔 색상의 오픈 카페와 상점이 여럿 들어서 있다.

또한 주민들의 안식처이며 만남의 장소이자 자그레브 관광의 출발점이다. 도시의 윗마을(Gornji Grad)에 위치하며

구 돌라츠 시장(Old Dolac Market)의 남쪽과 접해 있다.

광장 중앙에는 1866년에 오스트리아 조각가가 만든 동상이 세워졌는데, 

오스트로-헝가리 점령 당시 총독을 맡았던 반 옐라치치 백작의 상이며 말에 앉아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상은 칼이 뾰족하고 날카로워 마치 보는 이의 눈을 찌를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광장 이름은 이 동상에서 유래됐다. 동상은 여러 번 정치적인 위기를 맞이했는데

1947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1990년에야 그가 국가를 대표하는 민족주의자라는 판단으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동유럽권에서 익숙해진 트렘


한인식당에서 육계장으로 저녁식사 후 5성급 이라는 DOUBLETREE BY HILTON ZAGREB에 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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